(동북공정과 간도-열네번째 이야기)간도와 백두산 답사기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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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열네번째 이야기)간도와 백두산 답사기2
  • 김현규
  • 승인 2016.02.16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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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간도 연혁
간도는 우리 민족의 독립운동의 발원지이다. 간도는 북옥저의 옛땅으로 1880년 회령부사 홍남주가 처음 언급하였고 1902년 간도 관찰사였던 이범윤이 공식적으로 사용하였다.

일제시대 때 많은 애국지사가 이곳으로 건너와 일본군과 싸웠다. 화룡시에서 청산리 전투, 투먼시에서 봉오동 전투가 대표적이다. 그러면 이 땅의 역사에 대해 알아보자.
간도는 원래 함경북도 온성군 일대에 있는 두만강 유역의 하중도(河中島)와 삼각주를 일컬었다. 그런데 지금은 일반적으로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 있는 섬과 같은 땅인(사잇섬:間島) 옛 만주 일대를 가리킨다. 고구려 멸망 후 발해 시대에 많은 조선인들과 여진족들이 동북지역에 살았고, ··명나라 때는 압록강 북쪽의 요령성에 살았다.

고려 예종때 윤관이 여진정벌 후 두만강 700리 북쪽에 9성을 축조하고 선춘령비를 세워 경계를 정하였고, 원나라는 고려인들을 다스리기 위해 심양왕을 두기도 하였다. 명나라 초기에도 요동 일대에 수만 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당시 만주족이 거주하던 요동 지역 인구의 30%를 차지하였다. 17C초 명·청 전쟁 이후 대부분 조선으로 강제 이주하였고 일부 남았던 후예들은 청의 봉금정책으로 본계시와 하북성의 승덕시로 이주해 가서 살았다. 그러므로 19C 말까지 한족이 간도를 직접 지배하거나 살았던 적은 없었다.
청나라는 명을 정복한 다음 1658년 백두산 지역에 봉금령을 내렸다. 1677년에는 강희제가 봉금지역으로 정하고 조선인과 만주족을 강제로 철수시켰다.

1709
년에는 중국 땅을 측량하여 레지선을 긋고 책문(변문: 국경 검문소)를 설치하였다. 또한 1712년에는 정계비를 세워 조·청 국경을 정하였다. 그들은 조선과 청의 경계선 끝이었던 봉성(鳳城)을 고려문으로 불렀다. 따라서 청조때 간도는 봉금지대여서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1842
년 조선은 청에게 봉금지대에 몰래 들어온 중국 유민의 퇴거를 요구하였다. 19C 후반에 이르러 조선인들이 강을 건너와 땅을 개간하고 살았다, 이때부터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땅이 백두산을 중심으로 서, , 동간도로 불리기 시작하였다.
<다음호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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