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정한 관찰자의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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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한 관찰자의 시선
  • 서기원
  • 승인 2013.01.14 0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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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원 의정부의료원 원목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이 가능할까? 모든 일에 있어 어떠한 쪽에도 편향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수 있는 객관적이고 공정한 시선이 가능할까? 이 물음은 ‘국부론’ 으로 유명한 애덤스미스가 ‘도덕 감정론’ 에서 제기한 물음이기도 하다.

사람은 몸을 통에 세상 속에서 살아가기에 어쩌면 인간에게는 객관적인 공정성이라는 말 자체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선거철이 되면 사람들이 나름의 보수와 진보의 시선에 입각해 서로의 시선만이 객관적이 공정한 관찰이라고 주장하며 다른 주장을 지극히 주관적이라고 비판한다. 또는 자신의 삶의 지혜에 입각해 이번에는 어떤 후보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선거기간뿐만이 아니다. 이 두 시선은 한국 사회를 움직이는 두 개의 마법과도 같은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과연 누구의 주장이 맞을까?

두 개의 마법이란 한국의 국가안보와 경제를 바라보는 두 개의 관점이기도 하다. 문제는 이 마법에 걸려서 다른 사람의 시선을 제대로 수용하지 못하고 평행선으로 나아간다는데 있다.

서로의 입장을 반면교사로 해 배우기 보다는 한 쪽의 시선이 다른 시선을 압도해 버리는 방식으로 정치가 진행되어 왔다. 그래서 서로를 치유하고 보듬어 앞으로 나아가기 보다는 반복의 악순환만 되풀이 되고 있다.

각각 자신의 입장만이 공정하고 객관적이라고 하는데, 과연 어떻게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이 가능할까? 큐피트의 화살에 맞아 사랑의 마법에 빠진 연인은 제 3자의 시선에서 보면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그 둘만의 이야기가 시작되었기에 다른 여타의 이야기는 들어올 여지가 없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자신들만의 생각이 두 사람 사이에서 절대적인 것이다. 그러나 실연을 경험한 연인이라면 언젠가 자기 자신을 깨닫게 된다. 상대방이 어떤 존재였고, 나는 그에게 어떤 사람이었는지 비교적 차분하게 바라보게 된다.

그렇다.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확보하려면 ‘거리두기’가 가능해야 한다. 잠시 자신의 입장을 떠나서 다른 시선을 확보해야 한다. 타자의 시선에서 자신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계기를 통해 사람들은 뒤늦게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우리는 각자 자신의 쌓아온 ‘마법의 성’에서 잠시 외출할 필요가 있다. 유교적 마법, 기독교적 마법, ‘잘살아보세’의 마법, ‘진보’의 마법 등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자신의 입장을 떠난 거리두기를 시도해야 한다. 그래야 나도 제대로 바라보게 되고, 남도 제대로 바라볼 수 있는 공정한 관찰자의 시선을 확보할 수 있게 된다.

이 길만이 보수를 넘어 진보에로, 진보를 넘어 보수에로 나아갈 수 있는 바람직한 길이다. 이 길만이 해묵은 반복의 ‘마법’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길이다. 새 해에는 진보가 보수의 입장을 이해하는 이야기, 보수가 진보를 이해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으면 좋겠다.

새는 한 쪽 날개로 날 수 없다. 언제나 좌우의 날개를 펼쳐야 제대로 앞으로 그리고 위로 날아갈 수가 있다. 새 해부터는 세계를 무대로 힘차게 날아오르는 새의 모습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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