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의 ‘기준’ 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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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삶의 ‘기준’ 은 있는가?
  • 신희주
  • 승인 2012.10.28 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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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주 한북신문 논설위원


현재 여당과 관련이 있는 어느 어른과 말씀을 나누었다. 마침 학교에 대해 이야기가 나와서 혁신학교에 관심이 있다는 말씀을 드렸다. 어떤 학교인지 물으시고 관심을 가지신다. 그 분 주위에 학교에 들어가야 할 나이의 아이가 있으시다 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깨닫는다.

구체적인 내용을 따지지 않고 혁신학교의 시행을 당신이 반대쪽에서 주장했다는 것을…… 나의 일이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던 세상사가 결국은 나의 일이 되어 나에게 되돌아 오는구나…… 현재의 교육방법이 적절하지 않다면 언제라도 다른 선택을 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사람들이 과연 그들의 아이 일처럼 이해하고 헌신할 수 있을까?

요즘 자주 생각하게 된다. 내용을 따지고, 지켜야만 하는 원칙에 비추어 옳거나 그르거나 혹은 더 좋거나 나쁘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내게 무엇이 ‘생기는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은 아닌지……

먹고 살기 위해서라며 우리는 하나 둘씩 세상과 타협하며 철이 들어간다고 말한다. 당장 내 가족을 위해, 지금의 밥그릇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다’는 표현을 자주 쓴다. 그렇게 기득권이 얽어둔 구조 속에서 그 구조가 더 공고화되는 과정에 우리의 방관과 힘을 보태며 오늘을 살고 있다.

우리는 깨닫는다. 어느 누구도 수도자가 아닌 이상 세상 모든 것에서 순결하게 소신을 지켜나가기 어렵다는 것을. 그런데 그렇게 양심과 신념을 팔아 우리의 밥줄을 지켜나가다 보면,

곧 나와 내 아이들의 미래 밥줄이 암담해 질 수 있음을, 더 나아가 우리가 지키고자 한 가장 소중한 것들의 목에 칼을 겨누게 됨을 한참을 지나서야 깨닫고 후회하게 될 것을 비겁하게도 부지기수로 타협하고 눈을 감기도 하지만 절대 안 되는 것들에 대해서는 스스로 결단을 내려야 한다.

‘교육, 원칙, 스승……’
이런 단어들이 그립다. 과거 선비들이 그들의 스승의 의견에 모두가 동의하였겠는가? 청출어람은 기존 생각의 회의에서부터 시작된다. 나와 다른 생각이라도 나눌 수 있는 문화를 존중하고 자신이 옳다고 믿는 바에 대해서는 목에 칼이 들어와도 지켜내려는 신념과 확신.

그것이 고지식한 늙은이의 아집일지언정 그런 확신에 찬 삶을 살고, 생활에 녹여 엄격히 자신을 여몄던 그런 스승을 ‘존경’이라는 단어로 흠모한 것이었다.

지금 우리 스스로에게 가장 절실한 그 무엇은 삶의 지표가 될 ‘기준’을 내 안에 심고 판단하고 생활에 반영할 줄 아는 방법을 찾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또한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의 방법을 찾는 길이 될 것이다.

공교롭게도 요즘 우리가 열중하는 인문학의 화두다. 과연 자신이 꼭 지키고자 하는 가치를 바탕으로 확신에 찬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되는가? 당장의 ‘이익’에 의해 삶의 질을 재단하는 것은 엄밀히 타인의 기준으로 사는 꼭두각시다. 우리의 삶이, 조금은 덜 부끄럽고, 그래도 변명이 통할 수 있는 수준은 유지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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