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지명)에는 자연과 역사가 있다 ? 의정부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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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지명)에는 자연과 역사가 있다 ? 의정부2
  • 관리자
  • 승인 2011.03.24 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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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진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환궁할 당시 여정을 살펴보면 의정부는 서울에서 북방으로 나가는 관문이었던 것 같다. 두 차례 왕자의 난을 겪은 후 왕위를 차지한 태종이 환궁하는 태조를 마중한 곳이 전좌(殿座)마을(임금이 앉은 자리)인 것이나 파발이나 역이라는 지명을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파발이나 역(驛)이라는 용어가 교통 및 통신의 기능을 담당하는 곳임은 이미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서울 돈화문에서 42리 130보에 녹양역(綠楊驛)이 있다는 기록이 있는데 지금의 망월사역 근방이다. 녹양역은 서울에서 함경북도 경원 아오지까지 연결되는 첫 번째 역으로서 말 10필과 노비 및 역리가 72명이라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히 규모가 컸던 것으로 짐작한다. 역은 보통 대로에 30리마다 버드나무를 심었는데 버드나무가 무성하여 녹양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 같다.

녹양과 관련하여 녹양평(綠楊坪)이라는 지명도 있는데 의정부 일부와 호원동, 장암동 일대로 추측되고 조선 초 군마(軍馬)를 기르던 목장이었다. 도봉산과 수락산에 서식하는 호랑이의 피해로 목장의 기능을 상실할 때까지 일종의 병참기지 역할을 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군사적인 중요도는 한국전쟁에서도 확인된다. 의정부가 함락이 되면 바로 서울이기 때문에 의정부에서의 전쟁은 더 처절했다.

범씨가 많이 살아서 혹은 호랑이가 사는 동굴이 있다고 해서 범골이라고 불리던 호동(虎洞), 누원점이라는 상점에서 유래된 누원리(樓院里), 장수라는 곳에 원(院)이 있던 자리라고 해서 이름 붙은 장수원리(長水院里)라는 지명이 병합되어 호원동이라고 불리게 된 지명에서도 역시 서울로 들어가는 혹은 서울에서 북방으로 나가는 요지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게 된다.

바위소에서 흘러 들어오는 물이 삼형제소까지 길게 흐른다고 이름 붙여진 장수(長水)에는 주막거리가 형성되었는데, 조정대신들이 태조 이성계와 정무를 논의하기 위해 의정부까지 오는 길에 쉬는 곳이기도 했고, 다락원을 거쳐가는 상인들이 쉬어가는 곳이기도 했다. 장수원을 기준으로 안말과 바깥말로 구분되는 중심이기도 했던 이 곳은 그야말로 길목이었던 것이다. ‘말’은 ‘마을’을 의미한다. 일제치하 일본인들도 서울로 통하는 호원동 전좌(殿座)마을 인근에 많이 거주하면서 일본인들의 무덤이 많게 되어 이름 붙여진 ‘외미(倭墓)’라고 불리는 지명이 생긴 이유도 길목인 탓이었을 게다.

다락원이라고 불리는 누원(樓院) 역시 서울로 통하는 길목과 관련된 지명이다. 서울에서는 금난전권으로 보호받는 육의전 상인과 달리 난전상인들에게 일정 구역을 정해 장시(場市)에서 장사하도록 했다. 상행위가 활발하게 되자 삼대장시(三大場市)를 중심으로 전국 산지의 산물이 모이게 되고, 서울의 금난전권을 피해 장시 상인들이 동북면에서 서울로 들어오는 길목인 양주(의정부는 양주에 속했음)에 누원점(樓(院店)을 설치해 상품을 매점하여 서울에서 시장가격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누원은 상누원(上樓院)과 하누원(下樓院)으로 나뉠 정도로 번창하였는데, 하누원(下樓院)이 오늘날 호원동 일대다.

서울에서 50리, 이곳에서 포천 안기참까지 50리 되는 곳에 두험천참(豆驗川站)이라는 파발막을 두었는데 이곳을 파발막리라고 불렀다. 발장 1명과 군인 2명을 두었던 두험천참이 있던 파발막리와 의정부리가 병합되어 오늘날 의정부동이 되었다. 두험천은 서울로 흘러 들어가는 중랑천의 옛이름이다. 파발막은 서울로 이어지는 소식을 빠르게 전하기 위해 요지에 마련된 곳이니만큼 사람들 역시 많이 모이는 곳이 되었다. 파발막리에는 도살장과 우시장이 성황을 이루던 장터가 있어 지방에서 올라올 정도였다고 한다. 양주골 한우는 우리의 생각보다 더 오래된 브랜드였던 것이다.

의정부는 서울에서 북방으로 통하는 교통의 요지이자 상업의 중심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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