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이름(지명)에는 자연과 역사가 있다 ? -의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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땅이름(지명)에는 자연과 역사가 있다 ? -의정부
  • 관리자
  • 승인 2011.03.07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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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서진

한북지역의 문화와 역사에 관해 글을 써 달라고 한다. 한북이라는 말이 그리 익숙하지 않아서 사전을 찾아봤다. 한북지역은 한강이북지역이고, 지금 우리가 생각하고 있는 경기북부지역보다 훨씬 더 넓은 의미다. 바보 온달 장군이 한북지역을 차지 하기 위한 전쟁터에서 전사하였다는 기록이 있고, 근세에는 한북학회라는 기록도 있는데 함경도 지역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을 위한 단체였다 한다. 이런 기록들을 통해 본다면 우리의 한북은 625전쟁을 겪으면서 상당히 좁은 개념이 되어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휴전선 이하 한북지역을 지도에서 찾아보면, 서울 북부지역, 고양시, 의정부시, 양주시, 남양주시, 포천시, 동두천시, 파주시, 연천군 등이 포함되는 지역일 것이다. 물론 강원도 일부 지역도 포함될 것이다.

한북이 한수이북(漢水以北)을 줄인 말인 것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땅이름은 나름대로의 유래를 갖고 있기 마련이다. 땅이름에는 지형적 특성이나 지질, 기후, 교통, 군사요충지, 관아 등을 뜻하기도 하고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이름을 얻기도 했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여러 가지 이유로 그 이름이 변하기도 하는데 신라 경덕왕에 의해 우리의 고유지명을 중국식 2글자로 지명을 바꾼 것이 그 하나요, 일제치하에 전국의 지명을 조사, 정리하는 과정에서 일본식 명명(命名)과 더불어 지방의 작은 행정단위까지 한자어로 바뀌었다. 최근에는 행정적인 이유로 이름이 바뀌기도 하는데 유래를 따지지 않고 반영된 것이 많아 원 지명의 뜻을 알 수 없게 되어 확실한 어원을 알기 어렵게 된 것이 많다. 그럼에도 몇몇 남아 있는 흔적을 통해 땅이름의 유래와 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그 안에 우리네 삶이 녹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의정부시는 양주군의 한 부분이었던 시둔면이 양주면, 의정부읍을 거쳐 오늘날의 ‘의정부시’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처음 의정부시를 지나게 되었을 때, 왜 ‘의정부’라고 불리게 된 것인지 궁금했다. 서울과도 40Km는 떨어져 있어 중앙행정기관이 여기에 있을 이유는 만무했고 게다가 의정부 중앙로, 걷고 싶은 거리에 태조 이성계의 동상이 서 있는 것도 당최 이해가 되지 않는 일이다. 분명히 연관이 있으니 그렇게 불리고 또 기념하도록 한 것일 텐데 말이다.

태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고 후계자를 정하는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태조가 여덟 명의 아들 중 후계자로 방원을 선택하지 않자 ‘왕자의 난’이 일어났다. 이에 태조는 둘째 방과(정종)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함흥으로 떠난다. 함흥으로 가던 도중 동두천시 생연동에서 화가 치밀어 태조가 마신 우물을 어수정(御水井)이라고 전해온다. 그 후 두 번째 ‘왕자의 난’을 통해 왕위를 이어 받은 방원이 태종이다. 태종은 함흥에 계신 태조를 서울로 모셔오기를 바랬고 이에 여러 차례 함흥으로 차사를 보냈으나 번번이 태조는 태종이 보내는 차사를 죽여버렸다. 이에 소식이 없는 사람을 비유해 함흥차사(咸興差使)라는 말이 생겼다. 그러나 어미말과 망아지를 데리고 함흥차사로 간 중추부사 박순의 기지와 무학대사의 설득에 의해 환궁을 결심하게 된다.

태조는 환궁길에 포천시 소흘읍 이동교리에서 유숙하였고 이 마을은 임금이 주무셨다 하여 용상동(龍床洞))으로 불린다. 태조가 유숙하는 동안 병사들이 막(幕)을 치고 보초근무를 했다 해서 무봉리에는 막골이라는 마을이 있다. 포천시 내촌면에는 8일을 유숙했다고 하여 팔야리(여덟뱀이, 八夜里), 일동면 화대리에는 임금이 쉬어 간 곳이라 하여 ‘쉰터’라는 곳이 있다. 남양주시에도 팔야리라는 마을이 있고, 왕이 주무셨던 곳의 하천이라 해서 왕숙천(王宿川)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다.

환궁하면서 태조는 의정부에서 머무는데 이 때 조정의 대신들이 의정부에 와서 정사를 논의하고 태조의 윤허를 받기도 했다 하여 조선의 최고 관청의 명칭을 따 의정부(議政府)라고 불리게 되었다. 한편 태종은 태조가 함흥에서 환궁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듣고 마중하기 위해 양주(楊州) 남교(南郊)에서 머물렀다는 기록이 있는데 오늘날 의정부시 호원동 회룡골 입구인 ‘전좌(殿座)마을’로 추정한다. 임금이 앉은 자리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회룡(回龍) 이라는 말은 왕이 되돌아 왔다는 의미다.

태조는 끝내 환궁하지 않고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풍양별궁에서 생을 마감하였는데 그 동안 조정대신들이 태조를 뵈러 왔다가 알현하지 못하고 쫓겨났다는 연유로 퇴조원(退朝院)이라고 불리는 곳이 있었다. 그곳이 오늘날의 퇴계원이라고 전한다. 후에 연안이씨 문중에 이조원이라는 사람의 아들이 아버지의 이름을 사람들이 함부로 부르는 것 같아 퇴계원이라고 고쳤다고 한다.

의정부는 태조 이성계와 관련한 이야기가 많은 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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