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룡(回龍)
상태바
회룡(回龍)
  • 한북신문
  • 승인 2023.10.16 09:0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의정부시의 시명(市名) 유래를 의정부시청 홈페이지에서는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조선 제3대 태종이 방번과 방석을 살해하고 소란을 일으키자 태조는 불충불의한 자와 함께 살 수 없다고 하여 함흥으로 옮겼다. 이후 태종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어 용서를 빌었으나 태조는 사자를 감금, 살해하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태조는 화가 누그러지는 듯 하면서 태종 2년(1402) 12월에 지금의 의정부까지 돌아오게 되었다. …태조는 결국 한양으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의 의정부지방에 장기간 머물렀다고 한다. 의정부 3정승을 포함한 각 대신들은 한양보다도 지금의 의정부로 와서 정무를 의논하고 결재를 태조에게 받았기 때문에 의정부라는 지명이 생겨났다고 전한다.

그러나 이 설명은 역사적 사실과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위 설명 중 필자가 밑줄을 그은 부분이 바로 그러하다. 태조는 퇴위 후 ‘조사의의 난’에 가담하고자 함흥에 간적이 있으나 함흥에 머문 기간은 불과 몇 일 이었고 그 기간 태종이 보낸 사자를 맞거나 심지어 죽인 일은 전혀 없다.

이후 조사의의 난이 진압되고 관군에 나포된 태조는 함흥을 떠나 평양을 거쳐 금교(金郊)에서 태종의 영접을 받고 당시 수도였던 개경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태종 2년(1402) 12월 (8일)이라는 일시는 맞으나 의정부로 온 적은 없다.

따라서 현재의 의정부에서 장기간 머물거나 심지어 조정의 대신들이 찾아 와 정무를 논하는 일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

의정부라는 시의 이름은 관청 의정부에 소속된 역둔토가 둔야에 있어서 이를 말미암아 발생한 지명으로 ▲1592년 이정귀의 <임진피병록>의 ‘의정부시장’ ▲정조 연간 작성된 <노상추일기>의 ‘의정부점’ ▲여러 실록에 자주 등장하는 ‘의정부평’ ▲대동지지의 ‘의정부’ 등의 사례에 나타나는바 이미 조선 중기 이전부터 사용된 지명임을 알 수 있다.

이런 사실이 지적되자 의정부문화원을 비롯한 일각에서 다음의 기사를 예를 들어 태조와 태종이 의정부에서 만난 적이 있다고 주장한다.

○… 임금이 양주(楊州) 남교(南郊)에 나가 머물렀으니 태상왕(太上王)의 환가(還駕)를 기다리기 위함이었다. 태상왕이 양주 객사(客舍)에 머무르니 임금이 알현(謁見)하고 술을 올려 매우 즐기었다. 저물어서 남교의 장전(帳殿)으로 돌아왔다. 이튿날 새벽에 태상왕이 출발하여 해촌(海村)의 들에 머무르니 임금이 따라와서 술을 올리고 냇가의 행전(行殿)으로 물러와서 머물렀다.<태종실록 12권, 태종 6년 11월 5일>

그러나 이 기사 어디에도 태조가 태종을 죽이려고 활을 준비했느니 철퇴를 소매에 숨겼느니 하는 정황의 일말을 찾을 수 없다. 화해한 태조와 태종이 온천에 다녀오는 아버지를 맞이하여 장소를 옮겨가며 연회를 즐기는 내용뿐이다.

하물며 그 장소는 양주 객사가 있던 지금의 <양주 고읍(古邑)>과 도봉의 해등촌이었는데다 그나마 태종은 당일로 환궁하였고 태조 역시 11월 5일에 환궁하고 있으니 어느 겨를에 대신들이 <의정부>에 와서 ‘정사를 논의하고 태조의 결재를 받는다는 것’일까?

금년도 「회룡문화제」에 ‘태조와 태종의 만남, 회룡가’라는 공연이 진행되는 모양이다.

문화의 도시 의정부시에는 오늘도 시의 지명유래를 두고 <역사왜곡>이 요란하게 진행 중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