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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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전쟁
  • 한북신문
  • 승인 2023.07.10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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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지금은 천혜자원인 지열(地熱)을 이용한 값싼 전기를 사용하는 첨단 정련(精鍊) 산업이 주종을 이루게 되었지만 19세기까지 덴마크의 식민지였던 북극해의 섬나라 아이슬랜드의 산업은 어업이 유일하였고 그나마 생산성이 있는 어종은 대구뿐이었다.

문제는 바로 이웃나라 영국이 이 대구를 대량으로 소비한다는 것이었다. 영국의 국민음식이라 할 <피시앤칩스(Fish and Chips)를 만드는 가장 좋은 재료가 바로 대구여서 영국 북부해안의 어부들은 대규모의 선단을 꾸려 대구의 주 서식지인 아이슬란드 근해에서 대구 어획에 나섰다.

영국 어민들은 아이슬란드의 공인된 영해가 3해리이니 그 영해 밖 공해에서의 어로는 국제법이 보증하는 자신들의 합법적인 권리라 주장하였다. 대구 잡이가 유일한 생계였던 아이슬란드 어민들은 이와 같은 대국의 횡포에 결연히 맞서기로 한다.

그들은 우선 자신들의 영해를 12해리로 확장 공포하였다.

물론 이는 당시 통용되던 해양법에 위반되는 일이었으나 그들에게는 생존이 달린 문제였다. 당연히 영국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고 어선단을 보호하기 위하여 기존의 어장에 군함을 호위함으로 파견하였고 아이슬란드는 이에 굴하지 않고 자국의 해군을 동원하여 이에 맞서게 된다.

1958년 9월1일 이렇게 3차에 걸치는 영국과 아이슬란드 간 <대구전쟁>이 시작된다. 문제는 양국의 엄청난 해군력 차이였다. 항공모함 3척, 순양함 6척, 구축함 55척, 호위함 84척, 잠수함 48척을 보유한 세계 최강의 영국해군에 맞서는 아이슬란드 해군이 동원할 수 있는 전체 전투함은 1000t 규모의 경비정 6척과 정찰기 1대 뿐이었다. 그나마 호위함 1척을 구매하겠다는 아이슬란드의 요청을 미국은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럼에도 아이슬란드의 주권 수호 의지는 단호하고도 결연하였다. 그들은 그 작은 경비정에 북유럽 바이킹 신화에 나오는 주신 <오딘> 그 주신이 사용하는 벼락망치 <토르>를 함명으로 명명하고 그 바이킹 정신으로 나라 바다 수호에 나선다.

영국 어선의 그물 밧줄을 끊고 배에 장착된 단 1정의 57mm기관총으로 실 사격을 주저하지 않았다. 동시에 50해리까지를 자신의 영해로 인정하지 않으면 영국과의 외교관계 단절은 물론 나토를 탈퇴하고 소련의 군함을 구입하며 소련에 잠수함기지를 제공할 수 있다는 단호한 자세로 일관하였다.

더 나아가 영해를 200해리로 연장하겠다고 더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고 나선다. 결과는 아이슬란드의 완벽한 승리였다. 영국은 아이슬란드의 영해 확장을 인정하고 아이슬란드 영해 200해리 일부 지역에서 대구를 어획하되 어선단은 최대 24척, 잡을 수 있는 어획량을 연 5만 톤으로 제한하는 협정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한반도 군사목표는 오직 하나 힘에 의한 현상변경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겪어 온 경험은 어떤 양보에도 저들은 평화와 공존에 절대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한다. 저들이 때로 합의하고 협정문에 서명하는 이유는 단지 자신들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과 과정일 뿐 결코 거기에 머무르지 않는다.

이제는 결연히 마주서야 한다. 싸우지 않는 방법은 오직 하나 싸우는 것뿐이라는 교훈을 아이슬란드에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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