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기동(姜基東) 장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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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기동(姜基東) 장군
  • 한북신문
  • 승인 2023.06.27 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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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909년 1월15일 아침 옛 대한제국군 기병대 출신으로 일어에 능통하여 헌병보조원에 특채되었던 강기동(姜基東)은 자신이 근무하던 양주경찰서 고안분견대에서 체포되었던 의병 길인식 외 1명과 함께 현지를 탈주, 이탈하여 이은찬 의병장이 이끄는 창의원수부에 투신하였고 바로 의병투쟁을 시작한다.

의병의 마지막 단계인 정미의병의 동력도 국권의 쇠락과 함께 동력을 잃어가던 국망의 불과 1년 전이었다. 의병의 병력은 시나브로 축소되고 남한대토벌 등 일제의 강력한 군사작전으로 각지의 의병진이 격파되고 다수의 의병장들이 체포 순국하는 동시에 의병에 대한 동정과 지원 역시 썰물 빠지듯 감소하는 등 활동 여건이 급속히 나빠지고 있던 때였다. 그럼에도 강기동의 구국 활동은 대단했다.

양주, 의정부, 포천을 중심으로 그는 일본정규군과 거듭 치열한 전투를 벌이는 동시에 일제에 협력하는 매국노들을 징치하고 활동자금을 징수하며 우편환 수송을 비롯한 일제의 경제침탈에 적극 대응하는 등 수 십 차례의 투쟁을 통하여 그는 말기 의병을 대표하는 의병장으로 혼신을 다해 나라의 국권을 되찾기 위하여 헌신하였다.

그러나 점차 옥죄어오는 왜병의 세력을 감당하지 못하고 외국으로 망명하여 또 다른 항쟁의 불씨를 피우려다가 결국 망명길 원산에서 체포되어 1911년 4월17일 용산 일본군위수감옥에서 총살형으로 순국하고 말았다.

한국전쟁 초기 공산군의 집중 공세로 낙동강 방어선이 위기에 처했을 때 “지키지 못하면 죽어라(Stand or die)라는 절대 절명의 명령을 내리며 결국 전세를 되돌려놓았던 미8군사령관 워커(Walton Harris Walker) 중장은 의정부 근처 미 제9군단 예하 24사단 전투지휘소를 향해 이동 중이던 1950년 12월23일 오전 10시경 양주군 노해면 도봉리 3구 외곽의 도로, 현재의 도봉역 2번 출구 140m 지점에서 불의의 사고 즉 한국군 육군 제6사단 2연대 수송부 정비대 수리공인 민간고용인 박경래씨(당시 27세, 무면허)가 수리를 마친 차량의 시험주행을 위해 도로가에 나란히 주차되어 있던 5대의 차량 중 4번째 차량인 닷지 WC-51 쓰리쿼터(3/4톤) 트럭에 충돌하여 현장에서 순직하게 된다.

이후 박정희 정부는 당시 한강 가에 조성된 최고의 외빈용 호텔을 그의 이름을 따서 <워커 힐>이라 명명하였고 2010년 용산 주한미군의 제8군 사령부 영내에 그의 동상을 세웠다가 현재는 평택사령부 영내로 이전하여 현재에 이른다. 동시에 그의 순직 현장인 도봉역에는 그를 위한 기념비가 세워져있기도 하다. 거기다 금년 경북 칠곡군은 낙동강 전선에서의 그의 공훈을 기업하며 동상을 또 건립한다고 한다.

당연히 하여야 할 일이고 그래야 마땅한 일이기는 하다.

그러나 기울어져 가는 조국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는 처절한 헌신으로 일제와 싸우다가 마침내 장렬하게 순국한 의정부의 의병장 강기동을 기념하는 동상은 아직도 현장인 의정부, 양주에는 물론 전국 어디에도 없고 심지어는 대부분의 시민들이 그의 이름조차도 기억하지도 인식하지도 못한다는 사실이 부끄럽고 안타까울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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