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마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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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유감
  • 한북신문
  • 승인 2023.06.12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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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6세기 멕시코를 점령했던 스페인이 태평양을 건너 필리핀 마닐라를 점령하여 이를 근거지로 멕시코의 은을 명나라의 차, 비단, 도자기와 바꾸는 삼각무역을 진행하면서 멕시코로부터 항해식량으로 싣고 온 고구마를 복주의 상인 진진룡에게 전수하였는데 만력 22년(1594) 복주에 기근이 들자 금학증이 이 고구마를 구황작물로 처음 보급했다고 전해진다.

만력 36년(1608)엔 농학자 서광계가 재배법을 정리하면서 명나라 전역에 퍼졌고 지금의 오키나와인 류큐왕국에도 전래되었다. 1609년 류큐왕국이 일본의 사쓰마 번(오늘날의 가고시마현 일대)에 복속되는 과정에서 1705년 마에다 리에몬이라는 어부가 본토에 가져가 사쓰마 지역으로부터 보급되었기 때문에 ‘사쓰마 지역의 마(이모, 芋)’라는 뜻에서 ‘사쯔마이모’라는 명칭이 붙었다.

이 고구마는 흉년든 일본 농촌의 기근을 구제하였으므로 ‘부모에게 효도하는 마’라는 뜻의 ‘고고이모(孝行芋)’라는 별칭을 얻게 되었고 이 별칭이 우리나라에 전파되어 <고귀마>를 거쳐 <고구마>가 되었으니 결국 <고구마>는 본래 외래어인 셈이다.

고구마가 조선에 전래된 경위는 조선 영조 39년(1763)에 조선 통신사 조엄이 일본 쓰시마 섬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이듬해 제주도와 동래부(부산) 영도에서 이를 기르기 시작했다는 설이 정설이다.

정조 18년(1794) 12월25일의 실록기사에는 “연해 지방 고을에는 이른바 고구마라는 것이 있습니다. 고구마는, 명나라의 명신인 서광계가 찬술한 <농정전서>에 처음 보이는데 칭찬을 하며 말하기를 ‘그것은 조금 심어도 수확이 많고,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으며, 가뭄이나 황충에도 재해를 입지 않고, 달고 맛있기가 오곡과 같으며, 힘을 들이는 만큼 보람이 있으므로 풍년이든 흉년이든 간에 이롭다.’고 하였습니다”는 내용이 보여 고구마의 효용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동시에 같은 기사에 이 고구마가 보급되지 않는 이유에 대하여 “고구마 종자가 처음 들어왔을 때는 백성들이 다투어 심어서 생활에 보탬이 되는 경우가 왕왕 많았는데 얼마 되지 않아 영과 읍의 가렴주구가 따라서 이르면서 사나운 관리가 문에 이르러 고함을 치며 수색을 하였습니다. 관에서 백 포기를 요구하고 아전은 한 이랑씩 다 거두어 가니 심은 자는 곤란을 당하고 아직 심지 않은 자는 서로 경계하여 부지런히 심고 가꾸는 것이 점점 처음만 못해지다가 이제는 희귀하게 되었습니다”라는 서글픈 상황이 기록되고 있다“는 보고가 나타난다.

모든 정당이 다 민생을 말한다. 그런데 왜 갈수록 민생은 더욱 팍팍해지기만 하는 걸까? 어떤 정책을 어찌 적용해야 하는지를 몰라서가 아니다. 그들도 알고 우리도 알고 전문가는 물론 알고 민초들조차도 다 안다.

단지 늘 정파와 진영의 이익을 민생과 공의보다 앞장 세우는 못된 버릇 때문에 그렇다. 국회의원 개개인이 임기 내에 어떤 법을 발의하고 찬성하였는지, 어떤 법에 반대하고 어깃장을 놓았는지를 전수 조사하여 내년 선거에 반영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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