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구파(勳舊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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훈구파(勳舊派)
  • 한북신문
  • 승인 2022.07.08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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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논설주간 홍정덕
논설주간 홍정덕

세조가 조카 단종을 몰아내고 조선의 7대 왕으로 즉위하는 과정은 무슨 이념적 다툼이나 정론(政論)의 차이가 아닌 오직 권력 그 자체를 탐하고 쟁취하는 문자 그대로의 쿠테타이며 정변이었다.

문제는 세종의 장자이자 수양대군의 형인 문종이 30년에 걸치는 오랜 세월 세자의 자리에 머물러 있으면서 자신의 직할세력을 양성하지 못한데 있었다. 조선의 세자는 차기 권력을 준비하며 오로지 독서와 수양에 힘쓸 뿐 조금이라도 정치적인 견해를 들어내거나 자신의 당여(黨與)를 만들면 안 되었다. 혹여라도 공식 직무 이외에 세자의 주변을 맴도는 자는 후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다지려는 자로 간주되어 혹독한 탄핵의 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문종이 승하한 후 불과 12살의 나이로 왕에 오른 단종은 그를 지켜줄 세력이 전무하였다. 세종 치하에서 이미 권력의 정점에 올라있던 황보인, 김종서 등은 자신의 권세를 보전하고 기득권을 확보하는 데에만 집중하고 있었고 어린 단종의 등 위에서 그를 위해 수렴청정할 어머니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부존의 존재였다.

세종이 이와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간절히 후일을 부탁한 집현전 학사들의 태반은 이미 수양대군의 휘하에 들어가 있었고 심지어 동생에게 왕위를 빼앗겼다고 여기는 왕실의 최고 어른 양녕대군은 복수의 칼을 빼들고 왕실을 대표하여 수양대군을 왕위에 올리는 찬탈에 앞장서 쿠테타의 명분을 확보해 주고 있었다.

이후 세조는 왕위에 올라 자신이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뼈저리게 느낀 친위세력의 존재를 재인식하고 그들을 육성하는 일에 힘을 기울이게 된다. 계유정난의 추동자들, 상 복위운동을 저지하는 일에 앞장섰던 일부 집현전 세력들 그리고 처음부터 지신과 목표를 공유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해 온 여러 공신들, 세조는 그들과 자주 연회를 열고 사적(私的) 친분을 강화하며 그들에게 권력을 집중시켰다. 이들을 훈구파라 한다.

세조의 재세 당시부터 이들 훈구세력의 권력은 하늘의 나는 새를 떨어뜨릴 만큼 막강하고 강고하였다. 이들은 서로서로가 혼척(婚戚)으로 얽히고 권귀(權貴)로 뭉치며 권력의 사유화와 확대, 지속에 집중하게 된다. 세조의 아들 예종(睿宗)의 갑작스런 죽음과 석연치 않은 성종(成宗)의 즉위과정에도 이들 훈구세력의 간여가 역력하다. 자신과 자신의 후계자를 지키기 위해 세조가 육성한 훈구세력이 세조의 아들을 퇴역시키는 중요한 변인으로 작용하는 부작용을 일으킨 것이다.

조선 전기의 찬란한 민족문화, 성리학적 지도이념의 정착, 효과적인 부국강병 및 사회 안정화, 제도와 법전의 정비라는 뛰어 난 업적에도 불구하고 세조시대, 성종시대를 온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지 못하는 이유가 이들 훈구세력의 존재에 있다.

새 대통령의 취임과 새 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일부 세력의 과람한 진출을 염려스럽게 보는 시각이 있다.

역사는 언제나 엄혹한 지표로 오늘의 우리에게 방향을 지시해 준다. 더군다나 전 정권의 부정적인 평가의 일면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세심히 관찰하면 오늘 삼가야 할 일이 무엇인지는 자명해 지게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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