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록위마(指鹿爲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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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록위마(指鹿爲馬)
  • 한북신문
  • 승인 2020.10.23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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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8월 기해일에 조고(趙高)가 반란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여러 신하들이 듣지 않을 것을 걱정해서 이에 먼저 시험해 보기 위해 사슴을 2세에게 바치면서 말했다. “이것은 말입니다.”

2세가 웃으면서 말했다. “승상(丞相)이 잘못 알고 있다. 사슴을 말이라고 이르다니.”

좌우에게 묻자 좌우에서 어떤 이들은 묵묵히 대답하지 않았고 어떤 이들은 말이라고 말하며 조고에게 아부했고 어떤 이들은 사슴이라고 말했다. 조고는 사슴이라고 말한 자들을 몰래 법으로 처단했다. 그 후 모든 신하들이 다 조고를 두려워했다. <사기 진(秦)본기(本紀)>

진시황이 죽은 후 조고라는 환관이 진시황의 막내아들이었던 호해를 진의 2세 황제로 세운 후 이사를 비롯한 대신들을 모두 죽이고 국정을 장악하게 된다. 2세 황제는 만사를 조고와 의논하였고 조고는 진나라의 실질적인 황제라 해도 과언이 아니게 되었다. 조고는 반란을 일으켜 자신이 황제가 되고자 했으나 여러 신하들이 듣지 않을 것이 염려되어 먼저 신하들을 시험해보기로 작정하였고 그 방법이 바로 ‘지록위마(指鹿爲馬)’였다. 이제 권력을 확고히 장악하였다고 판단한 조고는 자신이 세운 2세 황제 호해를 살해하고 진왕 자영을 3세 황제의 자리에 앉혔으나 자영은 조고가 스스로 황제가 되려 한다고 의심하고 자객을 시켜 조고를 살해하고 삼족을 멸하였다. 결국 조고는 자신이 세운 왕에게 죽임을 당하고 만 것이다.

이렇게 제권을 놓고 다투는 사이에 민심은 멀어져 갔고 마침내 농민을 이끌고 기의한 유방과 항우에게 그 강대하던 진 제국은 멸망하고 말았다.

일련의 정치적 사안들 특히 한 카투사 병사의 석연하지 않은 휴가사태를 두고 여당은 이를 야당이 일으킨 지록위마 사건이라 개탄하고 야당은 여당을 향해 권력층이 야기한 지록위마 사건이라고 규탄하고 있다.

분명 진실은 하나인데 이를 바라보는 눈, 사안을 해결하는 방법은 크게 다르다. 온갖 논리와 정보를 동원하여 자신들의 진영과 동료들을 비호하고 감싸고 있다. 그러나 정치권이 모르거나 간과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사실이 하나있다. 국민은 바보가 아니다. 침묵하고 바라보고 있다고 해서 무시하고 속이고 내버려둬도 되는 그런 존재가 아니다. 국민은 모두 알고 있다. 단지 이를 바르게 해결하는 지의 여부를 묵묵히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한계점을 지난 용수철은 튀어 오르게 되고 비등점을 지난 물은 끓게 마련이다.

조고의 교만한 권력은 지록위마 사태에서 절정에 이르렀지만 결국 이로써 야기된 민중의 분노는 함양(咸陽)의 궁궐을 모두 불태우고서야 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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