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복절의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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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복절의 의미
  • 관리자
  • 승인 2019.08.22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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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논설위원·여행작가

흙 다시 만져보자 바닷물도 춤을 춘다우리가 광복절마다 즐겨 불렀던 노래다.
1910년 한일 강제합방 이후 일제는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고 황국신민화 정책으로 조선어 및 한글 사용금지, 국방헌금 강요, 그리고 징용 및 징병으로 많은 조선청년들을 전쟁터로 내몰아 우리 민족을 말살하려 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강압적인 통치는 태평양 전쟁 이후 극에 달해 민족주의자도 친일파로 돌아서게 할 정도로 가혹하였고 종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자 일제는 가미카제 자살특공대를 조직하여 미군을 공격하였으며 심지어 한국인을 대상으로 징병제를 실시해 부족한 병력을 채우고 탄알을 만들기 위해 놋그릇까지 공출하였다.
623일 오키나와 전투가 끝나고 미군 B29폭격기의 계속된 도쿄공습으로 일본군의 패색이 짙어졌다. 곧이어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원폭이 투하되자 일제는 무조건 항복을 하였다.
백범 일지에 의하면 김구 주석은 이 소식을 듣고 기뻐하기보다는 탄식을 하였는데 그것은 우리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얻어낸 승리가 아니기에 앞으로 우리가 겪어야 할 운명에 대한 걱정이었다. 그의 예견대로 해방과 동시에 국토가 분단되었고 1951년 대한민국은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승전국 지위마저 보장받지 못하였다.
1945815일 일본이 미군에 항복하자 스탈린은 군대를 보내 일본군과 전투 한 번 하지 않고 한반도 북부지역을 점령하여 북한을 공산화하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462월 북한에는 소련군 지원 하에 88여단 출신의 대위 김일성을 주축으로 한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가 조직되었다.
미군은 뒤늦게 남한에 진주하였고 대한민국 독립을 위해 싸운 임시정부와 광복군 요인도 환국하였다. 그 후 19488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었고 99일에는 북한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 들어섰다. 다시 말해 2차대전 중 194311월 미··중국 수뇌가 카이로에서 회담을 열어 한반도 독립을 보장하였지만 19452월 얄타 비밀회담에서 3.8선 분할을 계획한대로 우리의 운명이 결정지어졌다.
그런데 1950년 북한 김일성이 스탈린과 마오쩌둥의 지원을 받아 6.25전쟁을 일으켰다. 이때가 우리 국군에 의한 북진통일의 기회였는데 중공군의 참전으로 좌절되었고 이후 중부전선에서 고지탈환을 위한 공방전이 계속되다가 1953727일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처럼 우리의 광복은 해방과 동시에 분단 그리고 6.25전쟁이라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고 얻은 반쪽만의 해방이었다. 하지만 8.15해방으로 나라와 언어를 되찾았고 건국 후 정부와 헌법을, 그리고 한국동란을 겪으면서 대한민국을 수호할 강한 군대를 갖게 되었다는데 의미가 있다.

이 과정에 이르는 동안 태평양 전쟁 때 희생된 한국인 전몰자들과 독립을 위해 싸운 순국선열들, 그리고 6.25전쟁 때 대한민국을 수호하기 위해 싸우다 전사한 호국영령들과 참전용사들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희생이 있었음을 우리는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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