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엽을 죽이고 또 이괄을 죽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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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엽을 죽이고 또 이괄을 죽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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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8.22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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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광해군과 소수 집권세력인 북인을 축출하고 반정을 이루어낸 서 세력은 반정이 성공한 그 다음 날 10년 가까이 평안감사로 있으면서 새로 일어나는 북방의 강자 여진 세력의 조선 진출을 굳건히 방어해 오던 박엽(朴燁)을 광해군의 핵심 세력으로 몰아 처형해 버렸다. 광해군이 축출되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이유, 즉 그의 죄상(罪狀)은 크게 3가지였다.

아우를 죽이고 어미를 몰아내어 강상(綱常)을 위반하였고 궁궐을 함부로 중건하여 백성을 도탄에 빠뜨렸을 뿐 아니라 이 중 가장 크고 중한 죄는 명()의 재조지은, 즉 왜란으로 함몰된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워 준 막대한 은혜를 저버리고 오랑캐 여진과 통호한 것이었다. 그 여진과의 통호정책의 최전선에서 이를 실질적으로 보장한 사람이 바로 박엽이었다.

광해군을 축출한 반정 세력은 성리학적 명분을 내세웠으나 우리 모두가 주지하는 것처럼 본질은 광해군 집권기간 내내 정권의 핵심에서 소외되었던 서인들의 정권 탈취였다. 그들은 정권를 잡은 즉시 구 정권의 인사들을 대규모로 처형, 숙청하여 참수된 사람이 수 십 명, 유배된 사람이 수백 명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숙청은 이에서 그치지 않고 정권을 장악한 반정세력 안에서 또 다시 권병을 차지하기 위한 내분이 벌어지며 결국은 또 한 차례의 내란이 일어나니 이것이 곧 <이괄의 난>이다.

반정 당시 실질적으로 군세를 동원하고 이를 지휘하여 반정을 성공으로 이끄는 가장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던 이괄은 서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훈공이 격하되는 것은 물론 변방의 수장으로 좌천되었고 이에 반발한 그는 자신의 휘하 병력은 물론 심지어는 왜란 당시 조선에 투항하여 조선군으로 편입되어 있던 항왜들까지 규합한 서북군 전체를 거느리고 거병하여 곳곳에서 관군을 파죽지세로 격파하여 드디어 한양을 함락하였고 조선 정부에서는 국왕 인조가 공주로 몽진하는 참혹한 상황 끝에 겨우 사태를 수습하게 된다. 그리고 다시 정변에 가담한 많은 장수를 죽여 북변을 담당해야 할 무장 대부분이 소멸되고 만다.

이처럼 지나친 반대 세력 숙청은 결국 조선 스스로 장재(將材)를 말살하여 이후 호란이라는 국가 위변에 효과적으로 대응할 인재를 얻지 못하는 결과로 나타난다. 성대중의 청성잡기 제3권 성언(醒言)’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나온다.

정충신이 안현(鞍峴)에서의 전투를 이기고 물러나 털썩 주저앉아 크게 탄식하며 말하였다. ‘전투는 다행히 이겼으나 작년에 박엽을 죽이고 금년에는 이괄을 죽였으니 북쪽 오랑캐는 누구를 시켜 방어하게 할까‘”

병자년 남한산성의 참혹한 비극을 정확히 예언하는 정충신(鄭忠信)의 이 한탄은 오늘날의 정국을 향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적폐청산은 그 원인과 이를 야기한 불합리한 제도를 정비하는 일에 보다 큰 방점이 찍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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