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운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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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끄러운 유산
  • 관리자
  • 승인 2018.07.04 1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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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역사에 부끄러움이 있다면 그것은 역사적 행위의 담당자가 대의(大義)를 저버리고 사리(私利)를 추구하였을 경우일 것이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에 침공해 온 일본군 중에는 자신들의 행위를 부끄럽게 여기고 전력상 일본군에게 열세였던 조선으로 항복한 소위 항왜(降倭)1만명 가까이나 되었다.

그들은 우리 측 전선의 최선봉에서 적정(敵情)이나 전황(戰況)을 정확히 취득하여 우리 측의 작전에 큰 도움을 주었고 실제로 무기를 들고 동족인 일본군과의 전투에 직접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그러나 항왜가 있었던 반면에 순왜(順倭)도 있었다. 일본군에 투항하여 그들에게 적극 협력하였던 조선인들을 일컫는 말이다. 종전 후 그 순왜의 상당수는 일본으로 도주하였고 일본에 정착하여 일본인으로 살았다.

거기에 더하여 아예 조직적인 매국을 전개한 사람들도 있었다. 정문부(鄭文孚)장군에 의하여 포살된 국경인(鞠景仁), 국세필(鞠世弼) 등이 그랬다. 그들은 근위병을 모집하려 함경도로 온 임해군과 순화군 두 명의 왕자를 체포하여 함경도 전체의 행정권과 함께 일본군에 넘김으로 이후 조선의 외교적 입지에 극심한 타격을 주게 되는 것이다.

정문부장군의 북관대첩을 기록한 <북관대첩비>는 러일전쟁 당시 의병들의 승첩지인 길주현장에서 일본군 사단장에 의하여 강제로 일본으로 이송되었고 오랜 세월 일본 정국신사 한 구석에 전승기념물로 방치되어 있다가 한국에 반환되어 경복궁, 정문부장군 무덤을 거쳐 다시 함경도 현지로 귀환하는 곡절을 겪기도 하였다.

며칠 전 <능호관 이인상기념회>의 김용환 회장으로부터 양주에 소재하는 비석 3점을 소개받았다.

일제 통치시기에 양주군수, 회천면장, 경기도평의원을 지낸 이들 세명의 생애를 점검해 보니 바로 전형적인 친일인사들이었고 그 중 한명은 이미 <친일인명사전>에 그 이름이 등재된 상황이었다. 혹시 그네들의 후손들이 비석이 발견된 현지에 아직도 살고 있지는 않을까. 당시를 이해하고 연구하는 좋은 자료이기는 하나 부끄러운 역사 기록에 틀림이 없다.

그들의 당시 삶이 대의의 정직하고 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기에 그들의 업적을 기린다고 세운 비석이 부끄러운 역사가 된 이유이다.

오래전부터 고구려 답사 길에는 꼭 길림 통화의 양정우열사릉에 들른다. 그 항일열사의 무덤 앞에는 두 동강이 나뒹구는 큰 비석이 있다. 양정우 열사가 순국한 전투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운 만주국 인사들의 업적을 기념하는 송덕비이다. 중국은 그 매국노들의 기념비의 허리를 꺾어 항일열사의 무덤 앞에 자빠뜨려 놓았다. 통쾌하면서도 섬뜻한 현장이었다. 찾을 때마다 많은 중국의 어린학생들이 경건히 열사릉을 참배하고 있었다. 그리고 허리가 꺽인 매국노의 부끄러운 송덕비는 한마디의 웅변으로 삶의 지표와 가치를 교훈하고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가릴 수 없는 부끄러움이 분명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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