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산군, 노산군 그리고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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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산군, 노산군 그리고 광해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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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6.06 2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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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경연에서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가 아뢰기를 노산군(魯山君)의 묘지가 허물어진 지 여러 해가 되었고 조에서 치하는 일이 없으니 매우 미안합니다고 아뢰니 상이 사실 그러하다. 연산군(燕山君)의 묘지도 똑같이 시행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였다. 이정귀가 연산군과 노산군은 일은 같지 않지만 다 같이 여러 해 동안 군림한 임금이었으니 당연히 똑같이 대우해야 됩니다. 예관을 보내 치제하고 묘지를 지킬 사람을 증원하며 관에서 제수를 준비하는 등의 일을 각별히 거행하는 것이 좋겠습니다고 아뢰니 상이 모두 예관에게 의논하여 아뢰도록 하라고 하였다.

이에 예조가 회계하기를 노산군의 묘지는 영외의 먼 곳에 있어서 본군이 비록 네 명절에 품관을 시켜 제사를 지내게 하고는 있으나 지내는 법식이 초라하여 모양을 갖추지 못하고 있습니다. 부인의 묘는 양주 풍에 있으나 나무꾼과 소먹이는 자들이 맘대로 들어가고 향화가 단절되어 자손이 있는 천민만도 못하니 생각이 미침에 측은하여 자신도 모르게 눈물이 나옵니다. 일의 체모가 중대하여 신들이 함부로 처치하지 못하겠으니, 연산군도 똑같이 시행하는 일의 당부와 아울러 대신에게 의논하여 결정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광해군 2725>

위의 실록 기록은 이유가 어떠하였던 혁명으로 쫓겨난 폐주(廢主)들의 무덤을 돌보고 체모에 맞는 향사(享祀)를 받들 것을 건의하는 내용으로 그 대상이 되는 것은 숙부에게 왕위를 빼앗긴 단종과 반정으로 폐위된 연산을 대상으로 그 논의가 진행되고 있음을 본다.

일심(一心)으로 위군 충절할 것을 사대부의 제1 덕목으로 강조하던 시대에 반정은 성공하지 못하면 반역이요 이는 멸문의 화를 자초하는 일이었다. 동시에 이미 폐군된 임금의 추향(追享)을 건의하는 것 역시 자칫 일족 모두에 감당 못할 화를 부를 수 있는 대담한 거조(擧措)였다.

그러나 예조판서 이정구(李廷龜)는 과감히 이를 건의하였고 임금 광해는 이를 너그러이 공감하고 수용하였다. 아름다운 모습이요 군자다운 풍모였다.

아이러니컬한 것은 이 논의를 허용하고 그 혁신적인 건의를 전폭으로 받아들인 당사자 광해군 역시 종내 반정세력에 의하여 왕위를 내어 놓고 종내는 제주 유배지에서 쓸쓸히 치욕적인 생을 마감하고 남양주 낮은 언덕에 초라하게 묻히게 된다는 것이다. 정치의 무상함을, 권력의 덧없음을 그리고 인생사 한치 앞도 가늠할 수 없음을 아프게 실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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