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면(大杏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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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행면(大杏面)
  • 관리자
  • 승인 2018.05.01 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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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아버지의 가장 중요한 연중행사는 면민회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면민회>는 타향에 흩어져 사는 같은 고향 마을 사람들이 모이는 모임을 말하는데 여기서 말하는 <면민회><대행면민회>로 해마다 55일이 되면 북한산 아래 우이동 솔밭에 <황해도 안악군 대행면>에 살다 남한 땅 대한민국으로 월남해 온 실향민들이 1년에 한번 만나는 모임이었다.

<면민회>에 아버지는 한 번도 빠지시는 법이 없었다. 언제나 한껏 정장을 차려입으시고는 당연하다는 듯이 어린 나를 데려 가셨다. 전국 각지에서 모인 <대행면민>들은 이북오도청 황해도에서 임명한 <안악군수>, <대행면 면장>의 축사나 <면민회장>의 말씀에는 거의 관심이 없고 그저 만나는 대로 서로가 서로를 붙들고 울고는 했다.

대행면 중에서도 아버지의 주소지이셨던 생근리주민이나 아버지가 교사로 근무하셨던 제도리사람을 만나면 그 눈물은 더욱 짜고 흥건했다. 그렇게 아버지와의 눈물바람이 끝나면 그 다음은 영락없는 내 차례였다. 생판 모르는 이들이 아버지 곁에 쭈물거리며 서있는 내게 네가 경덕이 동생이가?”라고 묻거나, 아버지께 얘는 누군가요?”라고 물을라치면 여기 와서 얻은 내 아들일세. 경덕이 대신이지.”라고 소개하시게 마련이고 나는 그분들 품에 끌어 안겨 또 한바탕 영문 모를 그들의 눈물을 겪어내야 했다.

네 형이랑은 형제처럼 친했다”, “네 형은 참 공부를 잘했지”, “많이 컸구나등으로 시작되는 그네들의 자기소개와 고향의 추억 이야기를 진종일 듣고 또 들어야 했고 그 다음 해의 모임 역시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게 진행되곤 했더랬다. 어리던 나는 정확한 연유를 모르겠던 그 눈물의 의미가 그 때에는 전혀 이해되지 않던 것이었다.

그들이 떠난 고향 <대행면>은 지금이면 차로 3시간이면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들은 그것이 영이별인 줄도 모르고 잠시 소나기를 피하는 심정으로 가볍게 그 살던 터전을 떠나왔고 힘든 이역의 서러운 삶을 살다 살다 끝내는 타향 땅 어딘가에 쓸쓸히 묻혀갔다.

이제 <대행면>은 없다. 북한은 행정구역을 바꾸어 면 단위를 삭제했고, <안악군>을 나누어 <은천군>을 신설하며 아버지의 주소지인 <생근리>는 이웃 <양담리>에 통폐합되어 소멸되어버렸다. 절대로 절대로 잊어서는 안 된다며 내게 새기듯 가르쳐 외우게 했던 고향 주소 <황해도 안악군 대행면 생근리><황해남도 은천군 양담리>로 변해버리고 만 것이다.

<대행면민회>도 더 이상 모이지 않는다. 월남 1세대가 모두 세상을 떠나 모임에 나올 사람이 없게 된 것이다.

그렇게 <대행면>은 피 빛깔 망향의 한()을 우이동 솔밭에 노을처럼 하늘 가득 깔아 놓은 채 명칭도 주민도 기억도 죄 사라져버렸다. 그리고 나를 붙들고 고향의 형 <홍경덕>을 기억하며 울던 그 형들의 소식도 이제는 전혀 알 수 없게 되어버렸다. 고향 하늘을 향해 통곡하던 그 아리디 아린 한과 아픔을 어이할까?

대통령이 여러 해 만에 <제주 4.3> 추모식에 참석하여 유족들의 한과 슬픔을 위로하며, 민족사의 아픔을 치유하고 회복하겠다는 다짐을 하였다.
그러나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민족사의 아픔과 통한은 또 다른 한 켠, 천만 월남(越南) 동포의 가슴과 삶에도 여전히 선지처럼 짙은 빛으로 엉겨있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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