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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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수용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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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4.0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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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해방이 되면서 의정부에는 두 차례에 걸쳐 수용소가 설치되었다.

한 번은 북한에서 남하하여 일본으로 돌아가려는 패잔(敗殘) 일본 민간인들을 임시로 수용하는 시설이었고 또 한 번은 남북의 분단이 고착되면서 여러 가지 사정으로 북한의 정치, 사회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월남피난민들을 수용하는 시설이었다.

북한의 월남민들을 수용하는 수용소는 파주, 동두천, 의정부에 있었고 포천에는 의정부수용소의 지소가 있었는데 국립 의정부 임시 이재민 구호소라는 정식 명칭의 이 의정부수용소가 설치된 것은 1947년의 일이고 초대 소장으로는 와세다대학과 일본대를 나와 일본 외교관으로 활동했던 30대의 젊은 관료 홍성욱(洪聖郁)이 임명되었다.

당시의 상황을 점검한 자료에 따르면 북한에서 월남하는 피난민들은 10%가량이 정치, 사회적 불만자, 70%가 경제적 곤란, 그리고 나머지 20%는 만주, 중국 등에 살던 귀환동포가 북한을 거쳐 남하하는 것으로 되어있다.

월남자들은 강원도, 경기도의 남북 연선 전체에서 대규모로 남하하고 있었는데 의정부수용소로 일단 들어오는 포천 방면 월남자는 19487월 당시에 매일 약 300명에 달하였는데 그 중 약 200여명이 연고를 찾아 남하하고 수용소에는 매일 100여명의 피난 실향민이 새로이 입소하였다. 현재 이 수용소가 있던 자리를 특정할 수는 없는데 현재의 중앙초등학교 근처쯤으로 막연히 추정될 뿐이다.

194872일 초대 대통령선거일에 수용소 상황을 취재한 평화일보의 탐사보도에 따르면 약 50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텐트 10여 동이 설치되어 있었고 검역소와 이발시설이 부설되어 있는 아주 열악한 상황이었고 기자가 찾은 당일에는 약 100여명이 수용되어 있었는데 미군용 야전 간이 침대가 설치된 텐트가 있는 반면에 대부분의 텐트는 맨 바닥에 가마니만을 깔아 잠자리가 몹시 불편하였다고 한다.

가장 심각한 것은 식사였는데 겨우 한 공기 정도의 소량 식사를 하루 2회 제공하고 있어 수용된 사람들 모두가 심한 허기에 시달리고 있었고 그나마 복지시설이었던 이발소마저 유료로 운영하여 1회 이발에 40원을 받아 민원이 제기되고 있었다고 되어 있다.

물론 수용소에 장기간 머물기 보다는 대부분의 수용인들은 단기간 휴식을 취한 후 연고를 찾아 각지로 떠났으나 이후 수용소를 나와 의정부에 정착하는 피난민도 있어 이들 피난민들이 1947년 의정부지역 장로교회의 모교회인 <의정부교회>를 설립하고 이후 변천을 거쳐 현재의 <의정부 제1장로교회>가 된다.

<의정부 제1장로교회>가 위치하였던 지역에 피난민들이 <연백촌>이라는 황해도의 특정 지명을 딴 마을을 만들어 현재도 그 흔적이 남아있는 것을 보면 인연은 강력한 힘으로 면면히 계속되고 있다고 하겠다.

남북 분단이 어언 70년을 넘은 상황, 어머니의 등에 업혀 자유의 땅을 찾아온 그들이 5살이었다하여도 이제 벌써 80의 고령이 되었고 대부분이 망향의 한 속에 세상을 떠났다.

북한의 핵과 이에서 비롯된 전쟁의 급박한 위기를 해결하려는 한(), (), (), (), (), ()의 숨가쁜 행보가 전 세계의 주시 속에 진행되고 있다. 이산 실향민의 아들인 논자(論者)의 심정도 초조롭고 착잡하다. 선한 결과가 있기를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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