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이 지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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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이 지은 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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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19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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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서기 1623312일 불과 1400명의 서인(西人) 반정군은 거사의 전모가 고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포섭해둔 훈련대장 이흥립의 내응에 힘입어 손쉽게 쿠데타에 성공한다.

반정을 승인 받는 과정에서 광해군에게 축출되어 서궁에 유폐되어 있던 인목대비는 광해의 머리를 가져오라며 절규 통곡하였고 끌려와 자신의 앞에 무릎을 끓은 광해군에게 그가 왕위에서 폐출되어야 하는 3가지 대죄를 제시한다.

국왕 광해가 폭정의 책임을 지고 폐출되어야 마땅한 그의 범죄, 그 첫째는 폐모살제(廢母殺第), 어머니인 인목대비 자신을 서인으로 폐출하고 형제인 임해군과 영창대군을 죽인 폐륜이었다.

둘째는 함부로 토목공사를 일으켜 백성을 도탄에 빠지게 한 난정이었다. 그는 왜란 직후의 참혹한 경제현실을 무시하고 경희궁, 창덕궁을 중건하는 대대적인 공사를 일으켜 백성의 물력과 국가의 재용을 낭비한 탐학의 군주였다.

세 번째는 왜란을 당하여 풍전등화와 같이 무너져 내리는 번방을 위하여 천병을 파견하여 국난을 극복하게 해준 명()의 재조지은을 망각하고 오랑캐 여진과 화친을 도모한 불충의 역이었다.

그렇게 광해는 국왕의 자리에서 폐출되어 강화도로 유배되었다가 호란에 직면하여 제주로 이배되어 자신을 감시하는 포졸로부터 영감이라고 호칭되며 온갖 구박과 수치를 당하다가 폐출된 지 18년 만에 66세로 죽어 유언대로 어머니 공빈 김씨의 무덤인 남양주 송릉동에 묻혀있다.

불과 17세의 어린 나이로 홀로 도주한 아버지 선조 대신 국난을 극복하는 대임의 실제를 도맡아 평안도·강원도·황해도는 물론 경상, 전라에 이르는 전국을 순회하며 떠나버린 민심을 수습하고 군사를 모집하여 왜군에 대항하며 군량과 병기 조달은 물론 백성들의 안위를 돌보는 등 국가 안위의 중심에 있었으나 적실 아들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아버지의 홀대로 33살의 늦은 나이로 가까스로 왕위에 오른 후에는 선혜청을 두고 신료들의 악착같은 반대에도 결국 대동법을 시행하고 양전을 통해 경제회복의 기초를 닦았으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신속삼강행실, 국조보감, 동의보감 등을 편찬하였고 적상산 사고(史庫)를 설치하여 실록을 보존하는 등 문치에 전력하였다.

신흥하는 여진과 기존 명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진행하고 아울러 박엽 등 유능한 장수를 기용하여 북변의 국방을 강화하여 전란에 대비하는 한편 일본과는 기유약조를 체결하여 외교를 재개하고 대규모로 포로를 쇄환해 온 그의 공적은 고려되지도 기억되지도 않은 채 오로지 정파의 이익과 정략이 우선된 그의 폐출과 당시의 평가는 이제에 이르러 본질적인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있다.

더구나 그를 폐출한 인조 정권의 이념 편향 정책이 불러온 삼전도 항복과 굴욕, 그리고도 여전히 대명천하의 소중화 의식, 만절필동의 사대정신이 조선 후기 정신사에 끼친 그 심대한 오염, 결국은 망국에 이르게 하는 후진, 퇴보의 결과를 볼 때 아쉬움은 더욱 크다.

한 대통령의 탄핵과 그의 실책을 추구하는 재판의 진행을 보면서 느끼는 씁쓸한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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