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윤소정
상태바
배우 윤소정
  • 홍정덕
  • 승인 2017.07.13 18: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940, 의정부는 조선 영화와 아주 밀접한 인연을 맺고 있었다. 1933년 현재의 의정부중앙초등학교인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한 앳된 처녀 <차홍녀(車紅女)가 연극을 시작하여 희락좌(喜樂座), 新撫臺, 黃金座를 거쳐 1935東洋劇場에 입단하고 그 해 동양극장의 제작자였던 <임선규><차홍녀>를 주인공으로 설정한 각본을 쓰고 제작하여 무대에 올린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전의 대히트를 치면서 이어 동일 각본의 영화 홍도야 우지마라가 제작된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공연되던 당시 얼마나 많은 인파가 몰렸는지 마침내는 기마경찰이 동원되어 질서를 유지해야 했고 하루 종일 극장에 앉아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를 보고 또 보며 직장(?)에 출근하지 않는 기생들 때문에 서울의 유흥계가 장기간의 휴업 상태에 들어갔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37성봉영화사는 지금의 의정부 신시가지에 260평 규모의 <의정부촬영소>를 준공하고 본격적인 영화제작에 들어갔고 이 촬영소를 인수한 <조선영화주식회사>는 이를 확장하여 1938년 현상소와 녹음실을 갖춘 최신식 시설로 확장한 후 1939년 대규모의 최신 시설을 갖춘 촬영소가 준공되었고 1940년 유치진 극본의 <풍년기>가 본격적인 촬영에 돌입하게 된다.


당시로서는 최신 기법을 동원하여 세계 무대로의 진출을 꿈꾸는 야심적인 영화 시설이었다. 한국전쟁을 겪으며 이 촬영소는 철저히 파괴되어 그 흔적을 찾을 수 없다

함경도 회령의 신흥보통학교 고등과에 입학한 윤봉춘은 그 학교로 편입해 온 나운규라는 학생을 만나는 데 윤봉춘이 간도 명동학교에 들어가자 거기서 다시 또 운명적으로 나운규를 만나게 된다.


졸업한 후 윤봉춘은 나운규가 들고 온 영화 <아리랑>을 본 후 그 자신도 영화에 투신하기로 하고 나운규가 제작한 영화 <들쥐>에 출연한다.


1929
년의 일이다. 일제 강압기 민족정신을 내세워 조선 영화를 이끌던 나운규, 윤봉춘 컴비가 이렇게 탄생한다. 윤봉춘은 강력한 지도력을 바탕으로 연기와 연출을 넘나들며 조선 영화계를 주도하였으나 1930년대 말부터 극심하게 조선 영화계의 숨통을 조여오는 일제의 폭압정책이 노골화되자 그는 강압적인 <조선영화인협회>에 합류를 거부하고 1940년 의정부 산곡동으로 낙향, 은거하게 된다.

후일 그 스스로가 회고하였던 것처럼 당시는 첩첩 산골이었던 산곡동에서 그는 <산곡서당>이라는 학교를 열고 우리말과 노래를 가르쳤다. 일제 순경이나 헌병의 감시와 발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윤봉춘이 낙향하여 아이들을 가르쳤던 그 <산곡서당>이 지금의 산곡초등학교가 된다

그 윤봉춘의 셋째 딸이 바로 배우 <윤소정(尹素貞)>이다. 1944년생이니 그녀 역시 의정부 산곡동 태생이리라. 대배우 오현경의 부인이요, 중견 배우 오지혜의 엄마이기 전에 <국민엄마>로 통칭되던 대배우였다. 그녀 윤소정이 패혈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우리 의정부로서는 의정부와 연관된 영화의 인연 한 가닥을 또 잃은 셈이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