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무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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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무덤
  • 홍정덕
  • 승인 2017.03.28 16: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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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임진년에 발발한 왜란은 왜군의 초기 승전에도 불구하고 명()의 참전과 이순신이 이끈 수군의 활약, 그리고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들의 분전으로 왜군의 기세가 꺾이면서 휴전과 함께 강화 담판으로 들어간다.

그러나 이 담판이 무위로 돌아가자 풍신수길은 다시 조선에 재 출병하게 되는 데 이를 정유재란이라 부른다. 임진년 아래 패전의 요인을 분석한 왜군은 호 장악에 총력을 기울이는 한편 점령지에 대한 초토화에 몰입하게 된다.


저항하는 관민은 물론 점령당한 각지의 고을은 철저히 약탈되고 지역의 민초들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살육과 약탈의 대상이 되었다. 공포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 외에 의병에 합류하여 자신들을 위협할 수 있는 요소를 애당초 제거하려는 것이 목적이었다. 당시 일본군을 따라왔던 종군승 케이넨(慶念)조선일일기(朝鮮日日記)’에 이런 기록이 있다.

백의(白衣)를 입은 조선인을 보면 노약남녀의 구분 없이 마구잡이로 죽이거나 잡아서 죽통으로 재갈을 물려 끌고 간다. 부모는 아이를 찾고 아이는 부모를 찾아 절규하는 광경은 지옥에서도 찾기 힘들 정도로 비참하다.’

풍신수길은 참전 군인들이 허위로 승전을 조작하여 보고하지 않도록 승전 보고서에 반드시 참수한 조선군의 머리를 첨부하도록 하였으나 보관 및 수송의 문제가 발생하자 목을 대신하여 귀를 베거나, 코를 베어 첨부하도록 하였다 왜병들은 전투원이 아닌 일반인의 코와 머리를 베어 보내는 사례가 비일비재했다.

일본 교토에는 풍신수길의 명복을 비는 <풍국신사(豊國神社)>가 있고 그 바로 앞 모퉁이에 <귀무덤(미미츠카)>라고 불리우는 아담한 규모의 일본식 무덤이 있다.


바로 풍신수길에게 보내어진 조선인의 귀와 코를 묻은 무덤이다. 일본인들 조차 참혹한 살육의 증거물인 이 무덤을 상서롭지 않게 여겨 이곳을 비껴 다니는 형편이니 관광차 교토에 들른 한국인들이야 그 정확한 존재조차도 제대로 모르고 지나치게 되는 무심한 현장이다.

언젠가부터 인근에 사는 한 일본 여인이 이 무덤 주변을 청소하고 주위에 무궁화를 심어 가꾸고 향을 피우며 관리해 왔는데 그 여인은 이 무덤의 내력을 알고 찾아가는 한국인 방문객들에게 무덤 입구의 문을 열어주어 참배하게 하고는 끝에 조용히 서서 숙연한 자세로 함께 참배를 하곤 하였다.


전에 내가 들렀을 때는 이미 나이가 많아 무덤의 관리를 며느리에게 넘기고, 그래도 한국인들이 방문하면 예전처럼 조용히 함께 머리를 숙이곤 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시 정유년(丁酉年)을 맞았다. 왜군이 재침한지 420, 60주갑이 지났다. 흉폭한 전쟁 폭력에 희생되어 아직도 머나먼 이역을 떠도는 원혼들을 우리가 이렇게 까맣게 잊고 있어도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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