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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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서른여덟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
  • 김현규
  • 승인 2017.03.16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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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여행작가
맺음말
5.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과 탄핵정국
19C 말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다. 고종은 친정 후 일본과 수교(1876)하고 20년도 채 안되는 기간에 친청, 친러정책으로 전환하여 열강세력을 한반도에 끌어들였다.


조선군을 궤멸시켜 청의 침입을 유발하였던 이괄의 난처럼 구식군대폐지 등 잘못된 군제개혁과 봉량미 문제에 불만을 품고 5군영 군인들이 일으킨 임오군란은 민비세력이 청군(1500)을 끌어들여 일본군과 대치케 하였다. 외국군대가 들어온 이후 조선은 갑신정변, 동학란, ·, ·일 전쟁 등을 겪으면서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광해군은 일본과 수교하고 경제와 국방을 강화한 개혁군주였다. 이에 반해 고종은 대원군 섭정 때 신미·병인양요를 지켜보고도 시대의 흐름을 읽지 못한 무능한 군주였다. 더군다나 집권 초기에 운요호 사건으로 병자수호조약을 맺고 근대국가로 발전한 일본군대의 위력을 볼 기회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부국강병을 위한 일련의 개혁을 못한 것은 일본··러시아가 조선을 병탄하려는 의도를 파악하지 못해서이며 그 결과 민비세력이 정치에 개입하게 되었다.


고종집권초기 일본은 징병제를 실시하고 정한론자 사이고 다카모리에의해 서남내전(1877)을 치루며 근대국가로 성장했다. 그러나 조선을 병탄할 국력에는 이르지 않았고 일본이 전쟁할 수 있는 군사력을 갖춘 시기는 동학란과 청일전쟁이 일어난 1894년 무렵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고종이 개혁할 기회와 시기를 놓쳐버려 민비세력이 정치에 개입하게 된다.


민비 세력은 임오군란, 동학란을 진압하기 위해 친청정책으로 청군을 끌어들이는가하면 청·일전쟁 후엔 일본을 견제하려고 친러정책으로 전환하였다가 일본 낭인에 의해 을미사변의 화를 당한다.


한반도를 강탈하려는 중국과 러시아에 구걸 말고 차라리 경제침투를 노리는 일본과 꾸준히 교류해 부국강병을 추구했더라면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 통치까지 받지는 않았을지 모른다. 청나라에 의지했던 민비와 박근혜 전 대통령도 유사점이 있다.


박 전 대통령은 취임 후 중국을 먼저 방문하고 천안문 열병식에 참석하는 등 3년간 친중사대주의 정책으로 일관하였다. 그런데 지난 해 초 북한이 핵실험을 하자 갑작스레 한미동맹으로 돌아섰다.


이런 대통령의 친중 행보와 일단의 세력에 의한 소통 없는 독단적인 정책운영은 오히려 사드에 반대하는 중국의 기대치와 그에 따른 배신감만 높여주었다.


그 결과 자신의 직무가 정지되는 탄핵사태를 가져왔고 이를 틈타 지금 중국이 기고만장하여 경제보복을 가하고 있다. 부모를 일찍 여읜 민비가 인척과 안동김씨 중심의 노론세력과 결탁해 대원군에 대항했던 것처럼 대통령도 혈육 아닌 최순실 일당을 비선으로 끌어들여 국정을 농락하다 탄핵의 화를 자초한 것이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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