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북공정과 간도-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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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북공정과 간도-서른여섯 번째 이야기) 간도가 우리땅인 이유-9
  • 김현규
  • 승인 2017.02.21 1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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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규 여행작가


맺음말
5. 인조반정 이후의 조선과 탄핵정국
이것은 병자호란 이후 선포된 봉금령이 조선의 압록강, 두만강 이북의 영토개척을 가로막았고 한편으로 사대주의와 당파싸움을 본격화시켜 자주정신과 개척정신을 상실케 하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그것은 조선사회에 서서히 뿌리박아 19C 말 척사파를 거쳐 지금 우리 정치인의 일부 계층에 이념투쟁과 중국을 의식하고 눈치 보는 것으로 그 잔영이 남아있다. 그러면 조선의 영토가 축소되는 과정을 살펴보자.

조선 초기만 해도 조선의 군사력은 강했다. 당시 명은 철령위를 설치해 고려의 북진을 저지하고 압록강 이북 요동의 여진족을 초무, 복속하려했다. 이에 맞서 이성계는 조선을 건국한 다음 정도전과 함께 다시 요동을 정벌하려 하였다.

조선왕조 태조실록에는 철령을 따라 이어진 북, , 서쪽은 원래 원에서 관할하던 군민이 소속해 있던 곳이니 중국인, 여진, 달달인(몽고인), 그리고 고려인을 그대로 요동에 소속시켜야 된다는 주원장의 친서와 북계(北界)는 여진, 달달(몽골), 요동, 심양지역과 서로 이어져 있으니 실로 국가의 중요한 요충지입니다라고 이성계가 우왕에게 올린 상소문의 내용이 실려 있다. 또한 남은이 군사는 이미 훈련했고 군량미는 비축되었다. 가히 동명성왕의 고토를 수복할 시기가 되었다고 언급한 것도 기록되어 있다.

이런 까닭에 명태조주원장(홍무제)은 본계시에 철령위(1393년 심양 북쪽 철령으로 옮김)를 설치해 놓고도 조선이 요동을 공격해오면 어찌 대책을 세워야 하나하고 걱정할 정도였다. 이 말은 조선 초 명나라가 조선의 군사력을 두려워했고 조·명의 영토 분쟁 지역도 간도, 연해주가 아니라 군사적 요충지 철령이 위치한 요동이었음을 밝혀주고 있다. 더군다나 이곳은 원나라가 충선왕 등 심양왕을 두어 고려인과 여진족을 다스렸던 지역으로 명나라 초기에도 고려인이 요동 인구의 30%를 차지했다. 그런데 어찌하여 영토가 축소되고 나라마저 분단되었는가.

17C 초 청은 명나라를 정복한 다음 티벳, 신장, 후에 봉금지대를 편입시켰고 16C 말 전국을 통일한 일본은 메이지 초기에 북해도, 오키나와를, 러시아는 16C 말 예르마크 티모페예비치가 우랄산맥을 넘어 시비르칸국을 정벌한 이후부터 1875년까지 캄차카, 연해주, 사할린을 포함하는 시베리아 전 지역을 영토로 편입하여 늘렸다. 그러나 이 중요한 시기에 조선은 선조 때 권력을 잡은 사림들이 유교적 사대주의에 물들어 국방을 소홀히 하고 당파싸움에 몰입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두 번의 왜란과 호란을 겪게 되었다.

임진왜란 후 광해군은 북방정세를 파악하고 일본과 국교를 맺어 회답사를 파견하였다. 또한 급성장한 여진족에 대한 대비로 후금과 중립을 지켜 국방을 강화하였고 동의보감을 편찬하고 대동법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인목대비 폐비와 영창대군을 죽이는 등 광해군의 실정과 청과의 중립정책에 불만을 품은 친명사대주의자에 의한 인조반정이 일어난다. 이때 새로 등장한 서인세력은 중립정책을 친명배금정책으로 전환하고 이괄의 난을 유발하여 조선의 정예군이 궤멸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군사적대비도 않고 취한 반청정책은 후금의 정묘, 병자호란을 초래하였다. 그리하여 인조가 삼전도에서 항복하고 조선의 부녀자들은 심양에 포로로 끌려가 속환비용을 내고 환향녀(화냥년)가 되어 돌아오는 수모를 겪었다. 또한 압록강 이북의 영토를 잃었을 뿐만 아니라 남한산성 수축 금지 등의 군사적 제제를 받았다.

인조의 뒤를 이은 효종은 북벌정책으로 국방을 강화하여 1·2차 나선정벌을 승리로 이끌었다. 그러나 청의 봉금령(1677) 선포와 정계비건립(1712)은 조선으로 하여금 서·북간도 지역을 개척 못하게 하였다. 이 시기에 러시아는 네르친스크조약으로 오호츠크 북쪽까지 진출한 반면 조선은 이후 약 200여 년간 압록강, 두만강 이북 지역으로의 영토 확장과 개척에 제제를 받았다.
<다음회에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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