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당(捲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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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당(捲堂)
  • 홍정덕
  • 승인 2016.11.29 1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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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교육을 국가 경영의 최고 가치로 삼았던 조선시대 최고의 교육기관 성균관(成均館)에 입학하려면 문과 생원(生員), 진사시(進士試)에 합격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이들을 상재생(上齋生)이라 하여 서울의 고관 자제들을 특별히 선발하여 승보(升補)와 음서(蔭敍) 등 별도의 과정을 거쳐 입학을 허용 받은 학생, 즉 하재생(下齋生)들과 구별하였다.

이들 성균관 학생들에게는 기숙사와 식사가 제공되었고 성균관 학생들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반인(泮人)들이 배정되어 학교 주변에 반촌(泮村)이라는 별도의 거주구역이 존재하기도 하였고 학생들의 반찬과 선현 제향(祭享)에 소용된다는 이유로 조선시대 내내 엄격히 금지되었던 소의 도살과 판매를 이들에게 한정하여 허락하는 등 특혜를 주었다.

이 모두가 장차 국가 경영의 동량(棟梁)이 될 인재를 양성하려는 국가적 노력의 일환이었다.
아울러 이들 성균관 학생들에게는 재회(齋會)라는 자치기관이 있어 성균관을 주장하는 대사성(大司成) 등 관료들의 행정과는 별도로 광범위한 자치가 허용되어 학생들에 대한 징계의 전권을 가지기도 하였다.

이 재회에서 결정되는 사항은 전체 학생들이 이의 없이 따라야 했는데 더러 임금의 정치가 성리학적 가치 규범에 어긋난다고 판단되었을 때는 재회의 결의를 거쳐 단호하게 반대의사를 표명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의사가 받아들여지지 않았을 경우 이들은 수업을 거부하고 학교를 비운 채 물러나와 성균관의 기능을 마비시키곤 하였는데 이를 권당(捲堂), 혹은 공관(空館)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전 기간에 걸쳐 권당이 행해졌고 그 회수가 96회에 이르는데 성균관의 학생들이 권당을 하면 대부분의 경우 그 의견을 받아들이거나 적어도 국왕은 간곡하고 정성스러운 비답(批答)을 내려 이들을 설득하고 나라를 걱정하는 유생들의 선의를 치하하곤 하였다.

되어 먹지 않은 여자가 국정을 농단하여 온 나라가 시름에 빠져있다. 어찌하여 이와 같이 참혹한 지경에 이르도록 집권당이나 각료나 원로들은 사태를 방치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결국 분노한 시민들이 촛불을 들고 거리에 모였고 그 수효가 백만에 이른다고 한다. 거기에 상황이 여의치 않아지면서 대학생들은 물론 중고생 심지어는 초등학생들 이 항의까지 시위에 참가하고 있다. 이제 곧 수능을 끝낸 고등학생들도 대거 이 시위에 동참할 것이라고도 한다.

가히 현대판 권당이라 하겠다. 이들 다음 세대가 마음 놓고 공부하고 그 꿈을 이루도록 환경을 보장하는 것이야 말로 국가와 정치지도자들이 정책 구현의 최우선에 놓아야할 중요한 국가 가치이다.

속히 사태 해결의 방법을 찾아 학생들이 권당하고 거리에서 촛불을 들고 추위에 떠는 일이 시급히 마무리되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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