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강지처(糟糠之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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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강지처(糟糠之妻)
  • 홍정덕
  • 승인 2016.07.18 1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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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칠거지악(七去之惡)은 유교적 가치관을 가진 사회에서 아내와 이혼할 수 있는 기본적인 조건을 규정하는 관념적이자 실제적인 조건이다 당()나라의 법률인 大戴禮記(대대례기)에 나오는 말인데. 不順(불순) , 시부모에게 순종하지 않을 때, 誣告(무고) , 거짓을 일 삼을 때, 無子(무자) , 자식을 낳지 못할 때, 淫行(음행) , 부정하고 음란한 행동을 일 삼을 때, 嫉妬(질투) , 시기심이 많고 강짜를 부리는 경우, 惡疾(악질) , 전염병이나 불치병에 걸린 경우, 口舌(구설), 말이 많아서 구설수에 자주 오르는 경우, 竊盜(절도) 도둑질 하는 버릇이 있을 때이다.

그러나 이는 유교의 가치관이 정치적인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는 과정에서 나타난 한 정형(定型)일 뿐 우리의 전통사회에서는 이런 관념이 실제로는 잘 통용되지 않았다 조선(朝鮮)은 성리학(性理學)적 가치를 국가의 정치이념으로 하여 건국되었으나 그 성리학적 가치가 사회에 일반화되는 데는 긴 시간이 소요되었다.


실제로 조선사회가 성리학적 윤리를 사회의 일반 규율로 인정하고 규정화한 것은 양란(兩亂)이 끝나고도 한참의 세월이 지난 17세기에 이르러서야 가능하였다


한가지 예를 들자면 조선 중기 까지도 남자가 여성의 집에 장가들어 거의 일생을 처가살이로 일관(一貫)하는 것이 상례였고 조선 중기에 이르러 비로소 나타나기 시작한 족보(族譜)도 초기에는 남녀의 차별은 커녕 직손(直孫)과 외손(外孫)의 구별 조차 없이 모두를 동일하게 등재(登載)한 것은 물론 재산도 균일하게 분배(分配)하였던 것이다. 가장 예민한 부분인 조상에 대한 제례(祭禮) 역시 자녀들이 남녀구분 없이 나누어 담당하는 일이 상례여서 이를 윤회(輪廻)제사라 하였었다.

아울러 설사 아내가 위에 열거한 이혼 사유, 즉 칠거지악에 해당되는 경우라 하여도 다음과 같은 경우에는 아내와 이혼 할 수 없었으니, 즉 아내가 시집와서 함께 부모상(父母喪)을 치렀을 경우,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그 집안이 부유하게 된 경우, 내보내도 갈 곳이 없는 경우이다. 여기에 더하여 부모가 아내를 사랑하는 경우에도 내 보낼 수 없었다. 이를 감안하면 실제 조선시대에는 사대부가의 경우 실제로는 이혼이 불가능하였다고 보아 무방하겠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한 영화감독과, 많은 이들이 아끼고 사랑했던 여배우의 부적절한 관계가 요즘 사회를 시끄럽게 하고 있다. 사랑한단다. 비록 나이 차이가 많이 나고 세상의 이목도 있으나 사랑하니까 기필코 가정을 깨야 한단다. 그 감독은 자기 아내의 내조 없이 혼자서 그 자리에 올라갔다고 생각하나보다. 아내의 인권과 노력과 긴 시간의 내조(內助)는 무시하고 무작정 자신의 욕망과 욕구대로 살아도 된다고 생각하나 보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 그 집안을 부귀하게 만든 아내는 버릴 수 없다고 칠거지악(七去之惡)을 제정한 옛 선인들도 그렇게 귀하게 여겼다 그런 아내를 조강지처(糟糠之妻)라고 한다. 그 집안을, 자신의 남편을 세우기 위하여 술지게미와 쌀껍질을 함께 먹으며 고생해 온 귀한 아내라는 말이다.

그리고 흔히 말한다. 남의 눈에서 눈물나게 만들면 그런 인간은 결국 나중에 제 눈에서 피눈물 흘리게 될 거라고!
사랑은 귀한 것이다. 그리나 그 사랑은 자신을 희생하는 데에서 출발하고 비로소 완성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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