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金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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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金信)
  • 홍정덕
  • 승인 2016.05.31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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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아내가 병원에 입원할 때에 인()이도 병이 중하여 공제의원에 입원 치료하다가 아내의 장례 후에 완치되어 퇴원하였다. ()이는 겨우 걸음을 익히고 아직 젖을 먹을 때였다. 먹는 것은 우유를 썼으나 잘 때는 반드시 할머님만 알고 어머니가 무엇인지를 모른다.”

백범일지의 이 대목은 1923년 경 상해를 무대로 전개되던 임시정부의 독립 항쟁의 이면, 김구 선생의 개인적인 가정사의 한 모습을 그리고 있다.

남편을 따라 엄준한 독립항쟁의 동반자로 나선 최준례 여사는 극심한 생활고를 겪으면서도 일심으로 김구 선생을 내조하다 결국 폐질환을 얻어 세상을 떠나고, 그 남은 자리를 맡아 생활의 방편을 꾸미며 동시에 어머니를 잃은 김구 선생의 두 아들, ()과 신()의 양육을 담당한 것은 어머니 곽낙원 여사였다.

백범일지의 표현대로 한 때 구국의 대열의 동반자였던 임시정부의 인사들이 속속 왜구에게 투항하고 일천여명을 넘어 헤아리던 임정의 투사들이 모두 흩어져 겨우 수십 명에 지나지 않게 되자 원조는 끊어지고 정부 청사를 찾던 미국, 영국, 프랑스 등 서양인 친지들이 냉담해지는 상황에서 독립운동은 성공을 전혀 장담할 수 없는 현실의 벽에 직면하고 있었다.

결국 곽낙원 여사는 어린 손자 신()을 데리고 귀국하게 되는데 우여곡절 끝에 찾아 간 유일한 의지처였던 안악(安岳)의 김홍량(金鴻亮) ()에 머물다가 다시 중국으로 나와 임시정부 뒷바라지에 생애 모두를 헌신하시게 되는 그 형극의 여로에 여사는 손자 인과 신을 신념처럼 보듬어 안고 양육하며 독립운동가의 아들다운 신념과 기개를 잃지 않도록 지극 정성으로 훈육하였다.

돌아가시기 전 중국인들이 버린 배추 쓰레기를 추려 소금에 절여 놓으신 것을 임시정부 요인들이 요긴한 찬으로 사용하였다는 백범일지의 기록처럼 눈물과 고통을 애국심 하나로 인내하는 고통의 나날이었다.

할머니가 이국 땅에서 돌아가신 후 신()은 할머니의 훈육대로 독립전선에 투신하여 공군 비행사 양성 과정을 마치고 항일 전선에 참가하였고 광복 후에는 공군 창설에 주역으로 참가하여 조국의 하늘을 지키는 공군 장교가 되었다. 그는 한국 전쟁 당시 최초로 출격한 우리 전투기 조종사이기도 하였다.

생과 사를 넘나드는 전선에 임할 때마다 그의 가슴에 남아 그를 용전(勇戰)의 길로 이끌어 갔던 신념의 근본은 무엇이었을까? 독립과 구국의 화신이었던 아버지 백범이었을까?

나는 오히려 그의 생애를 이끌어 간 신념의 바탕은 역경 속에서 그를 키워낸 할머니 곽낙원 여사의 빈 젖가슴이었을 것이라고 여겨본다.
중국인들이 버린 배추 쓰레기를 추려 소금뿐인 김치를 담그면서도 기개와 꿈을 포기하지 않고 오로지 조국 광복만을 염원하던 여장부, 그리고 그러한 여장부이기 이전에 어머니를 잃고 밤마다 외로움에 우는 손자에게 , 군사 국가로 만방에 우뚝 서게 되었다. 그리고 오늘 2016520, 향년 94세로 ()’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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