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되는 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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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되는 도움
  • 신희주
  • 승인 2016.03.21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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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주 논설위원·글과생각 대표
요즘 보도되는 기사를 보고 있으면 끔찍하다. 친자식을 학대하고 살해하고 또 그 시신을 훼손하고 유기하는 방법을 듣고 있노라면 사람이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싶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뭔가 사회 부조화 속에 만들어진 왜곡된 친권과 양육방식의 결과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모든 개인은 사회의 생산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부모가 될 준비를 하고 부모가 되는 경우가 현대는 드물다. 과거에는 두 집안의 결합과 그 결과로 이어질 다음 세대로의 대물림을 위해 자식을 본다. 그러니 두 집안의 조화를 보고 혼인 당사자의 사주를 맞추며 택일을 하고, 길일을 가려 합방하고 스스로에게 굉장히 엄격하게 하며 태교하고 양육한다. 그 자식은 가문의 한 구성원으로서 자리가 있고 그런 구조 안에서 만들어지는 다양한 교육과 사회화가 그 안에서 이뤄진다.

체벌을 동반한 부모의 양육태도도 그와 맥을 함께 하며 일종의 의식과 같은 것이었다. 1차적 관계인 가족들 사이에도 적용이 되는 견고한 레짐이 이미 형성되어 있는 셈이다. 개개인의 개성이나 특성을 고려하기에는 구조 안의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이 더 커서 개인보다는 가문과 집단이 더 중요시되었다.
오늘날은 적어도 형식적으로라도 애정이 전제된 두 남녀가 만나 가정을 꾸리고 아이를 양육할 경제적 형편을 고려해 출산하는 경우가 많은 듯하다. 치열한 자본주의 사회의 경쟁에서 살아남아야 한다는 대 명제를 위해 오로지 그 한 곳만을 위해 달려가고 있다.

아이의 양육과 교육의 방식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하고 그 외의 것들은 모두 불필요한 것이거나 아니면 죄다 다음 기회로 미뤄가면서 현재를 저당 잡힌다. 아이의 출산과 양육에 관한 부담은 고스란히 부모라고 불리는 개인에게 오롯이 떠넘겨진다.

부모가 될 준비도 미처 하지 못했고 부모가 무엇인지에 관한 고민도 없이 또 이를 위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여건도 마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이들에게 가족과 아이의 의미는 어떻게 다가올까? 가끔 부모들이 아이들을 바라보고 대하는 이유를 듣고 있노라면 아이 대신 애완동물이나 보험 등으로 바꿔 불러도 별 차이를 느끼지 못할 때가 있어 슬프다.
지나친 비약이다 말하고 싶다. 나에 관한 고민과 삶에 관한 고민이 없는 개인에게 책임져야 하는 아이의 인생이 더해지는 것은 부담과 고통을 넘어서는 다른 의미를 찾기가 어렵다.

어느 의사 부부가 내게 한 말이다. 하루 종일 병원에서 근무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다른 이의 손에 맡겨져 있던 아이가 부모와 있게 되자 계속 울었다 한다. 아이 아빠는 피곤하다고 귀를 틀어막고 신경질을 내고 있고, 아이 엄마도 아이 아빠처럼 병원에서 똑같이 근무하고 돌아와 피곤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아이가 우니까 분유를 타서 먹이고 안아주고 얼러도 아프지도 않으면서 계속 울음을 멈추지 않았다 한다. 결국은 인내심에 한계를 느끼게 되어 아이를 침대로 집어 던져버렸다고 했다.
누구에게나 도움은 필요하다.
사람은 행복하게 살기를 바란다. 그 방식과 기준이 서로가 다를 수는 있다. 그러나 어느 일방에게만 불행을 강요할 권리는 그 누구에게도 없다. 또 책임을 물을 수도 없다. 부모가 되기 위한 교육이 필요하다. 그리고 부모 전에 개인으로서 나 스스로를 긍정하고 사랑하고 함께 할 수 있는 도움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양육의 방법을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스스로 행복하고 또 함께 행복할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고 이해하고 방법을 찾아나가는 그런 것들이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아무 의미 없이 누군가를 위해 오늘의 내 삶을 살게 되면 행복하지 않다. 오늘 나는 왜 사는가 하는 질문을 가끔 던져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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