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에서 왜 원숭이가 사라졌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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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왜 원숭이가 사라졌는가
  • 이명수
  • 승인 2016.01.29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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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연구소장


병신년(丙申年)새해 어둠과 매서운 바람을 헤치고 붉은 원숭이의 해에 붉은 태양이 희망을 이루기 떠오른다.

어느 동물보다 모성애(母性愛)가 강한 원숭이는 인간과 가장 많이 닮은 영장의 동물로 부부 자식 간에 극진한 사랑과 부부의 정은 때론 사람들도 부러워한다.

어미 원숭이가 새끼의 털을 골라주며 늘 껴안고 그림자처럼 붙어 다니고 있는 모습을 보면 애틋하고 처연(凄然)한 감상을 일으키기도 한다. 자식을 잃고 창자가 끊어질듯 한 슬픔을 표현한 단장(斷腸)의 고사(古事)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중국의 남북조시대 군인들에게 잡힌 새끼 원숭이를 찾아 100리를 따라온 어미 원숭이는 끝내 새끼 원숭이를 찾지 못한 채 애통함에 창자가 끊어져 죽었다는 이야기다. 이때부터 원숭이는 지극한 모성애의 상징으로 받아들여졌다.

원숭이는 예전부터 이어져 내려온 동물이 아니라 그런지 낯설고 신화와 전설속에서도 원숭이를 소재로 한 작품이 많지 않은 편이다. 국토 지리지 정보원이 140만개 전국 지명을 조사했는데 원숭이의 관련된 지명은 황금 원숭이를 의미하는 금원사 등 8개 지역에 불과했다고 한다.

동물 민속학자인 천진기 국립민속관장은 충청 지역에서 선사시대 원숭이 이 발견되긴 했어도 그 뒤로 한반도 기후가 크게 변했다면서 조선 초기에 중국과 일본에서 원숭이가 선물용으로 들어왔다는 기록정도만 남아 있다고 했다.

16세기 조선학자인 이숙권은 패관잡기에서 우리나라에는 원숭이가 없으므로 고금(古今)시인들이 원숭이 소리를 표현한 것은 모두 틀렸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원숭이는 가축(家畜)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겐 생소한 동물이며 동물원에 가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먼 옛날 우리나라에 원숭이가 정말 서식(棲息)했을까 삼국유사에 보면 신라 법흥왕14년(527년)순교자 이차돈(異次頓)이 처음 아도(阿道)가 불교를 전파하려 할 때 불교 봉행(奉行)을 주장하였으나 모든 신하들이 반대하여 처형하려고 하자 그는 불법에 신(神)이 있다면 내가 죽을 때 이변이 있을 것이다. 이에 목을 베니 붉은 피가 젖빛으로 변하여 솟구치니 이를 본 원숭이들이 떼 지어 울었다는 대목이 나온다.

1973년 연세대 발굴 조사단은 충북 제천 용두산 점막 동굴 퇴적층에서 지금은 없는 짧은 꼬리 원숭이 이 발견됐으며 1976~1983년 청주시 두루봉 동굴에서는 큰 원숭이 위 아래 턱 이 출토되었다.

1986년 한 교사에 의해 6차례 걸쳐 발굴조사가 이뤄진 단양군 삼태산 남쪽 중턱에 위치한 석회암 동굴에서 큰 원숭이 아래턱과 어금니가 출토됐으며 2004년 영월 연당 쌍굴에서 같은 원숭이 뼛조각 8점이 나왔다.

1394년(태조3년)일본 사신이 왜구에게 잡혀간 양민을 돌려보내며 원숭이를 바쳤다고 기록했다. 세종대왕은 제주도에서 사육하는 원숭이를 잘 기르고 번식시키라는 명(命)을 내리기도 했다.

학계에서는 충청지역을 발굴 토대로 약20~30만년전에 한반도는 원숭이가 서식하기 좋은 아열대 기후였으나 한냉 기후의 변화로 멸종했을 것으로 보이는 가설도 있다.

학계에서는 원숭이 해를 맞아 한반도에서 원숭이 자취가 왜 사라졌는지 구체적으로 연구하여 후세(後世)에 전해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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