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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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얀마의 아웅산 수치 여사
  • 이명수
  • 승인 2015.12.17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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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연구소장


미얀마 군부(軍部) 53년 만에 종식(終熄)을 알리는 역사의 새 고동 소리가 울렸다. 그토록 오랜 세월 군정(軍政)의 억압 통치와의 과정에서 감옥과 가택 연금(軟禁)을 치루어 왔던 아웅산 수치(71)여사는 산고(産苦) 끝에 민주화를 이루었다.

1962년 네윈 육군총사령관이 쿠데타로 집권한 뒤 반세기 이상 지속되어 온 군부 독재가 막을 내리고 27년간 온갖 수난을 겪은 수치 여사의 민주화 운동이 새로운 자유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었다.

군부는 1990년 총선에서 NLD 82%의 지지를 얻어 압승 했을 때도 부정선거라며 무효화 시킨바 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군부의 영향력이 아무리 강하다 한들 이번 총선에도 부정선거라고 밀어 부칠 수는 없을 것이다.

국민들은 두 번 다시 군부 통치 선거속에 속지는 않을 것이며 강력한 국민의 민주화 염원을 거스를 수는 없을 것이다. 또다시 그런 시도가 있다면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가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군 최고 지도자인 민아웅흘라잉 군사령관은 이날 수뇌부 회의를 가진 뒤 군은 이번 선거를 통해 새로 출범하게 될 정부에 대해 협력할 것이라고 페이스북을 통해 밝혔다.

곧이어 데인세인 미얀마 대통령으로부터 수치 여사는 평화로운 정권이양의 약속을 받으면서 반세기에 걸친 퍼즐조각들이 속속 맞춰지고 있다.

이번 총선의 승리에는 미얀마의 독립영웅 아웅산 장군의 딸인 수치 여사가 그 중심에 있었기에 가능했다. 수치 여사는 1945년 6월 19일 아버지 아웅산과 복지부 장관 등 고위직을 지낸 전 인도 대사인 어머니 도킨치 사이 양곤에서 태어났다.

부친인 아웅산 장군은 1886년부터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미얀마)를 독립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여 국민적 영웅으로 추앙받던 인물이었다. 그러나 독립 2년만에 정적(政敵)에게 암살당하는 비극으로 아웅산 수치 여사는 어머니와 함께 미얀마를 떠나 영국에서 생활했다.

1964년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하여 정치학과를 졸업했으며 1972년 국제 연합 본부에 근무하던 중 영국인 마이클 에리어스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다. 수치 여사는 어머니가 조국 미얀마를 못잊어 먼저 귀국하여 생활하다 1988년 뇌졸중으로 쓰러지자 병간호를 위해 귀국했다가 민주화에 가담한 시민 수천명을 참혹하게 학살(虐殺)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그해 8월 26일 고향 양곤의 쉐다곤 사원(寺院)인근 공원에서 무려 50여만명의 시위 군중이 모인 가운데 공포로부터 자유라는 제목의 연설을 통해 민주화의 투사로 제2의 험한 인생을 시작했다.

아울러 미얀마를 일당 통치하던 사회주의 계획당(計劃黨)에 다원적 민주주의를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미얀마 민중들의 뜻에 따라 야당 세력을 망라한 민주주의 민족 동맹(NLD)을 창설했다.

1991년 수치 여사는 민주화 운동의 공적을 인정받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지만 가택 연금 상태에 놓여 있었다. 이제 미얀마의 민주화를 향한 첫발을 내디뎠지만 앞길은 장밋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수치 여사는 선거 승리에 지나치게 도취하지 말고 당분간 군부(軍部)와 협력 관계를 형성하면서 민주화와 함께 사회 안정과 경제 발전을 병행시켜야 한다.

아시아의 최빈국(最貧國)중의 하나인 미얀마가 이번 역사적인 총선 결과를 토대로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지속적인 경제 성장과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경제 외교는 미얀마 국민의 생존에 관계되는 중요한 부분을 이룩해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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