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에 즈음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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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 독립운동 기념일에 즈음하여
  • 이명수
  • 승인 2015.11.27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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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경기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연구소장

올해로 86주년이 되는 광주(光州)학생 항일(抗日)운동 기념일이 지난 11월3일 기념식도 없이 그렇게 쓸쓸히 지나갔다.

광주 학생 항일 운동은 일본의 식민지정책으로 인한 차별이 광주 학생사건을 만들고 말았다. 나라 없는 설음 속에 일본인 교육자들의 무시(無視)그리고 우민(愚民)정책으로 인한 항일 항쟁 의식을 갖게 되었다.

1929년 11월3일 전남 광주에서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일어나 경성(서울)평양 신의주 함경도 그리고 만주뻘로 이민온 간도(間道)까지 확산되었다. 전국적인 동맹 휴학 학생 항일 시위로 변모되어 그 규모나 영향 역사적 의의에서 3.1운동과 나란히 하는 사건이었다.

식민지하에 어느 지역에서도 한·일간의 감정은 존재했었다. 도심의 중심지 노른자위 땅을 차지하고 정치와 경제적 특혜를 누리며 조선인에 대한 차별과 멸시를 일삼는 식민지의 삶은 고스란히 학생들 교육 생활에도 그대로 나타났다.

넓은 평야가 있는 전남 나주 경제적 부(富)를 독점하는 것은 일본인 대지주(大地主)들이었고 그들의 자녀들은 부유(富裕)를 누리며 광주로 통학하고 있었다.

가난한 한국 학생들은 차별과 멸시속에서 항일 의식을 키우며 광주로 통학하였으며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 도착한 광주발 통학 열차에서 내린 일본인 중학생들은 광주 여자 고등보통학교 학생인 박기옥, 성금자, 이광춘의 댕기 머리를 잡아당기며 희롱하였다.

이 광경을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 동생 박준채는 분노하여 항의 했으나 말을 듣지 않아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 싸움은 한국인 학생 30여명과 일본인 학생 50여명이 싸웠는데 화가 복받친 한국인 학생들이 더 유리하였다.

이를 본 일본 경찰들이 일본인 학생 편을 들고 광주 고보 학생들은 차별 수사에 대해 집단 항의하였다. 이에 일본인 기업들이 동인도회사를 모방한 식민지 수탈 기관인 동양척식주식회사를 설립하고 수탈하는 것에 대해 싸여오던 분노가 겹쳐서 폭발하게 된다.

이를 접한 1921년 11월 3일 여성독립 운동가 허정숙은 광주로 내려와 이를 관련학생들을 면담하고 경성지역의 여학생들을 여성 운동가들을 찾아다니며 시위할 것을 촉구하였다.

1929년 11월 3일은 일본왕 메이지(明治)탄생 기념일인 명치절 이었으나 또한 우리에게는 음력 10월 3일 국조(國祖)단군이 개국하신 날이었다. 우리의 개천절(開天節)에 일본의 신사(神社)에 참배를 강요당했던 광주 고보 학생들의 비통한 심정에 가해졌다.

일본 학생들의 무례한 도전이 광주 학생 항일 독립 운동의 도화선이 되어 전국적으로 194학교에 5만4천여명으로 당시 전체 학생의 절반이 넘는 학생들이 나라와 민족의 독립을 위해 자신들을 희생하였다.

광주학생 항일 운동 사건은 우리 민족사에 역사의 수레바퀴가 남겨온 자국들을 뒤돌아보게 하며 미래를 개척하고 주도(主導)해 나가는 새 시대 학생들에게 이정표가 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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