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향녀(還鄕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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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향녀(還鄕女
  • 홍정덕
  • 승인 2015.10.26 0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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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한국 콘텐츠진흥원이 펴낸 문화원형백과는 환향녀를 다음과 같이 정의하고 설명한다

“환향녀란 조선시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이후 절개를 잃고 고향으로 돌아온 여성 즉, '환향녀(還鄕女)'에서 유래한 말이다.‘
의정부시 자금동에 위치한 의순공주(義順公主)의 족두리묘와 관련하여 그녀의 생애를 설명하는 키워드는 “우여곡절의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불우한 여인”이다.

그가 효종의 딸 숙안공주를 대신하여 의순공주(義順公主)로 봉해져 청의 구왕(九王)에게 시집갔다가 남편이 역모에 걸려 죽은 후, 부하 장수에게 하가되었고 그 두 번째 남편도 1년 만에 죽어 쓸쓸히 살던 중 아버지 이개윤의 간청으로 조선에 돌아와 금오동 일우에서 외롭게 지내다가 죽어 거기에 묻혔다는 사실은 이제 어느 정도 사실(史實)에 부합하게 설명이 되지만 아직도 여전히 그녀가 시집가는 도중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는 허황(虛荒)한 야사(野史)는 그녀를 설명하는 과정에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이런 이야기도 전설로 전해 온다“는 식으로 첨언(添言)되고 있다. 당장 의순공주의 무덤 앞에 의정부문화원에서 세워 놓은 설명문에 조차 그렇게 특필되어 있다.

일전에 의정부과학도서관에서 의정부의 고교생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의순공주묘 답사에서도 답사를 안내하는 한국학중앙연구원의 정모씨는 “의순공주의 무덤이 언제 조성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나도 역사학자이지만 이 무덤에 의순공주가 묻혀있다고 확신할 수는 없다”며 그 이유로 그녀가 혼행(婚行) 중 강물에 빠져 죽었다는 전설이 전해져 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 야사가 오히려 신빙성이 있다는 단호한 말투로.

결론부터 이야기하자. 의순공주를 환향녀라느니,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힐 수 없어서 강물에 빠져죽었느니 하는 말은 의순공주를 모욕하는 심각한 사자(死者) 명예훼손(名譽毁損)이다

이는 조선왕조 500년 중 유일한 한중 왕실 통혼의 과정과 배경, 그리고 그녀의 남편 황부섭정왕(皇父攝政王)인 예친왕(睿親王) 도르곤(多爾袞)이 청나라 역사에서 차지하는 엄청난 위치를 모르는 무식의 소치이기 때문이다.

청 황실의 내명부(內命婦) 최상층을 “복진(福晉”)이라 부르는데 이 복진은 다시 적복진(嫡福晉) : 정실부인에게 내리는 작위로 대복진, 정복진, 계복진으로 구분하는데 이들은 모두 적복진이다)과 측복진(側福晉, 측실, 즉 황실의 첩실에게 내리는 작위)으로 나누어진다 이중 대복진(大福晉)은 정실부인 중 으뜸으로 이를 황후로 번역한다. 정복진(正福晉)은 일찍 죽은 정실로 살아서는 복진이 되지 못하고 죽은 후에 복진으로 추증된 이를 일컫고, 계복진(繼福晉)은 대복진을 제외한 정실부인이다.

도르곤과 결혼한 의순공주는 도르곤의 계복진으로 <계실(繼室) 대복진(大福晉)>으로도 칭한다. 도르곤의 정복진(대복진)인 박이제길특씨가 사망한 후 황제인 순치제의 승인을 얻어 여진족의 혼례절차를 갖추어 정식 비(妃)로 맞이했다.

이는 만일 도르곤이 사냥 중 낙마하여 죽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청의 황후가 되었을 수도 있는 위치인 것이다. 그런 그녀를 환향녀라고 칭하는 일이 어디 가당키나 한일인가? 그렇다면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소현세자의 부인 강비도 환향녀이고 역시 청에 끌려갔다 돌아온 봉림대군, 즉 효종은 환향남이라는 말인가?

내년 2016년이면 의순공주 환국 360주년이다. 이제는 그녀의 무덤을 의정부시의 지방문화재로라도 지정하여 정비하고 관련 추모사업을 진행해야 할 때가 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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