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天安門)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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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天安門) 광장
  • 홍정덕
  • 승인 2015.09.25 0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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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중국의 북경은 일찍이 춘추전국시대 <연>의 수도가 되어 당시에는 <계>라 불렸다. 중국을 점령한 몽골의 지배자들은 황하유역의 중심이며 동시에 초원으로 나가는 길목이라는 북경의 지리적 위치에 주목하여 이곳에 대규모의 궁성을 건설하고 이곳을 수도로 삼아 <연경(燕京)>이라 불렸다.

이후 골육상쟁을 통하여 집권한 <명(明)>의 성조(成祖) 영락제(永樂帝)는 자신의 권력 기반이었던 북경을 다시 수도로 삼았고 이곳에 현재의 자금성을 짓게 된다 이 자금성의 정문이 바로 오문(午門)이고 그 오문(午門) 앞의 넓은 광장이 바로 천안문 광장이다.

조선은 명(明)에 사대(事大)하였고 1년에도 십 여 차례가 넘는 각종 명목의 사신을 보냈다. 이 사행(使行) 중 황제의 생일에 보내는 성절사(聖節使), 황후의 생일에 보내는 천추사(千秋使), 그리고 연말에 보내는 동지사(冬至使)는 황제를 만나는 의식에 참가해야 하는데 이때 가장 정중한 의례를 행해야 했다.

명나라 때는 <6배3고두례(五拜三叩頭禮)>를, 청나라 때는 <3배9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행하는 데 이를 위하여 천안문 광장 한 구석에서 명 예조 관리의 지도에 따라 미리 이를 연습하는 <습의(習儀)>를 행해야 했는데, 고압적인 명의 하급관리로부터 심지어는 구타를 당하면서까지 혹독한 연습을 해야 했기에 사신들의 고통과 치욕감은 말로 다할 수 없었다.

1949년 10월 1일 모택동은 이 오문(午門), 즉 천안문 광장에 올라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고, 이어 6.25 내란에 북한을 편들어 참전하면서 우리와는 서로의 정식 국호를 부르지 않을 정도로 척이 지게 되었고 이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지던 영욕의 여러 행사는 우리로선 적대시 할 수밖에 없는 적국의 행사로 멀고 아득하기만 했다.

그러나 사실 우리와 중국은 국민당과 공산당을 막론하고 사실 혈맹이라 불러 마땅한 항일의 동지였다 우리의 <광복군(光復軍)>, <조선의용군(朝鮮義勇軍)>, 만주의 <독립군(獨立軍)>, <항일연군(抗日聯軍)> 등 무장 조직이 중국의 국민군, 홍군과 함께 항일 전선에서 피 흘려 싸웠고, 모택동이 이끄는 대장정을 끝까지 완수한 4명의 외국인 중 2명이 한국인일정도로 중국혁명 과정에도 동참했던 것이다

박근혜 대통령이 중국 항일승리 70주년을 기념하는 열병식에 참가하여 중국의 최고지도자와 나란히 천안문광장 성루에 오르고, 극진한 귀빈대우를 받으며 국격을 과시하는 장면을 보며 과거의 조선사행이 겪었던 신고(辛苦)와 대비하여 느끼는 감회는 크다. 더구나 열병식 내내 웅장하게 울려퍼지던 <중국인민해방군 행진곡>의 작곡자가 한국인 정율성이라는 사실 또한 새삼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홍군(紅軍) 노병과 국민당군 노병이 함께 당시의 군복을 입고 나란히 열병에 참가한 모습을 보며 남북의 항일 노병이 함께 광복기념식에 참가하는 그 언젠가를 간절히 소망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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