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제국군(軍)해산과 의병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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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군(軍)해산과 의병활동
  • 이명수
  • 승인 2015.09.10 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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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연구소장


광복70년 분단 70년의 고령(高齡)의 해를 맞았다. 우리는 광복의 기쁨도 있었지만 분단의 아픔도 뼈저리게 느껴야 한다. 분단은 6.25동란으로 동족상잔(同族相殘)의 비극을 겪어야 했다.

1905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맺은 을사늑약체결은 외교권마저 빼앗겼고 1907년 4월 대한제군(大韓帝軍)의 해산(解散)의 마지막 수순으로 일제의 강압으로 축소(縮小)된 군제 개편의 규모는 중앙군, 지방군, 헌병대를 포함해 8천여명에 불과하였다.

고종(高宗)의 헤이그 밀사로 강제 퇴위되자 군중 시위와 함께 제국군도 가담했다. 일본이 이 일을 빌미로 8월1일 제국군대 해산은 단행했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한 제국군인들은 남대문 총격전까지 벌이며 항쟁하였으나 역부족으로 무너지고 말았다 .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해산된 제국군인들은 귀향(歸鄕)하여 젊은 청년들을 모집 의병(義兵)을 조직했고 한편으로는 항일 투쟁을 위해 만주로 떠나야 했다. 그들은 국내외에서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독립전쟁의 전선으로 나가 불꽃처럼 젊음을 불살랐다. 유구한 민족사의 의병들은 무(無)에서 항일투쟁의 주역이 됐던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 되던 날은 의외로 매우 평온했다. 늦더위가 기승을 부리는 가운데 경복궁 근정전 앞에는 이른 아침부터 대형 일장기 두 개가 내 걸렸다.

한국 황제 폐하는 권력에 관한 통치력을 백성 모르게 비밀리에 일본 황제에게 양여(讓與)하였다. 5백년 왕조 치고는 어둠속에 온 나라가 너무 조용했다.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은 태조(太祖)건국 500년의 황혼속에 저물어 가고 있었다.

이렇게 되기까지 조선은 중국의 중화사상을 받들고 스스로 소중화(小中華)에 만족하면서 오랫동안 우물안 개구리로 지냈다. 오직 봉건주의와 유교사상을 신주(神主)처럼 받들고 변화와 개혁을 거부해왔다.

지구 반대편 서구 여러 나라는 18세기부터 시민 혁명으로 공화제(共和制)국가를 만들고 산업혁명으로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이루었다.

아시아에서 유일하게 서구 문물(文物)을 재빨리 받아들인 일본은 부국강병을 이루어 서구 열강과 함께 어깨를 나란히 하는 제국주의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다.

19세기 서세동점(西勢東漸)하는 세계조류의 큰 흐름을 깨닫지 못하고 개혁을 무시한 채 빗장을 채운 조선정치사(史)를 보면서 우리는 분단된 조국 통일 국가를 만들기 위해 국민 모두가 총력을 기울여 나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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