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모 요새 유적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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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라모 요새 유적지에서
  • 홍정덕
  • 승인 2015.08.31 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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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올해 40년 가까운 오랜 교직 현역에서 공식 은퇴하고 나자 나 자신에게 특별한 상을 주고 싶었다. 그래서 선택된 것이 일정에 얽매이지 않는 편안한 휴식, 힐링을 위한 여행이었다.

마침 달라스에는 처형이 살고 있어서 그곳 카펠이라는 조용한 중산층 주택가에 머물며 책 읽고, 산책하고, 수영하고. 시(詩) 쓰는 한가롭고 풍요로운 한 달 간의 휴가를 즐길 수 있었다.

그 와중에 계획한 것이 바로 산 안토니오 여행이었다. 텍사스 독립전쟁의 하이라이트였던 알라모 요새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대단히 흥미로운 여행이었다.

알라모요새는 본래 인디언을 위한 전도소로 처음 문을 열었다가 나중에 요새가 된 곳이다. 멕시코는 한반도의 7배 크기라는 텍사스와 여기 더하여 인근 여러 주를 영토로 확보해 놓고도 텍사스 독립운동이 일어날 당시 텍사스 전체의 인구가 불과 3000명에 불과했을 정도로 이를 개발하지 않고 300년간이나 그대로 방치해두고 있었는데 이 틈새를 미국이 파고들어 미국인의 인구가 원주민인 인디언과 멕시코인들을 추월하게 되자 미국인들이 주도하는 텍사스 독립운동이 일어났다.

멕시코는 산타 안나 대통령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텍사스 독립군에 대한 대규모 군사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그 정점을 찍는 전투가 바로 알라모 요새 전투였다. 불과 187명의 독립군은 요새를 포위한 수천 명의 멕시코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지먼 중과부적으로 결국 전원이 장렬하게 전사하였다.

이를 빌미로 미국이 군사개입을 하게 되어 미. 멕시코 전쟁이 벌어지고 전쟁에 패한 멕시코는 텍사스를 비롯하여 캘리포니아, 유타, 네바다 3주 전체와 뉴멕시코, 애리조나주의 대부분, 콜로라도 주의 절반 이상과 와이오밍 주의 남부 일부, 캔자스와 오클라호마주의 일부라는 거대한 영토를 미국에 불과 1500만 달러라는 헐값에 강매하여야 했다.

알라모 유적지에는 당시 전투에서 사망한 텍사스 독립군 187명의 이름을 당시의 나이와 함께 한 명 한 명 새긴 거대한 기념비가 요새 정문에 위치하고 있고, 요새 내부에는 당시의 전투상황을 한눈에 파악하도록 현장이 잘 보존되어 있었다.

그런데 알라모 요새 정문 앞 광장에서는 비보이 공연, 역사 탐방자들을 위한 문화해설, 다양한 먹거리 마당 등이 포함된 일종의 축제 분위기가 펼쳐지고 있었는데, 그 왁자지껄한 분위기를 형성하는 군중들의 대부분은 멕시코인들이었다.

그들은 요란하게 들리는 스페인어로 대화를 나누며 그 축제의 분위기 속에서 다양한 여름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음식을 먹고, 함께 춤추고, 환호성을 지르고, 그리고 요새와 기념탑을 배경으로 다양한 포즈의 사진들을 찍고 있었다.

그랬다! 적어도 멕시코인들에게는 조상 전래의 영토를 상실하는 계기가 된 치욕의 그 현장에서 너무도 자연스레 그저 여름 축제를 즐기고만 있었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그 곳이 어떤 곳인지, 알라모 요새가 가지는 역사적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인식이 전혀 없었다. 근저 먹고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미국, 특히 텍사스를 비롯한 남부 주에서 멕시코인들은 흑인들보다도 훨씬 낮은 인종적 차별을 당한다. 백인은 물론, 흑인들이나 심지어 우리 한국인들 조차 그들을 <멕짝>이라는 멸칭으로 부르며 그들을 더럽고, 잘 속이고, 게으르고, 비윤리적인, 사시꾼들로 인식하며 비즈니스는 물론 사교의 대상, 심지어는 고용의 대상에서 조차 기피하고 있었다.

자기들의 땅이었던 곳, 빼앗긴 땅에 숨어 들어와 자신들의 영토를 빼앗은 미국인들에게 천대 받으며 말도 안 되는 낮은 임금으로 고용되는 멕시코인들의 비극은 바로 올바른 역사의식, 민족의식의 부재였다.

그 알라모 요새 현장에서 나는 광복 70주년의 뜻깊은 해를 맞으며 우리가 무심히 잊고 있는 날 하나를 떠올려 보았다
사전에는 <국치일(國恥日)>을 “나라가 수치를 당한 날. 특히 우리나라가 일본에게 국권을 강탈당한 날인 1910년 8월 29일을 이른다.”라고 정의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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