캠프 에세이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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캠프 에세이욘
  • 홍정덕
  • 승인 2015.08.12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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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오랜 교직 생활을 공식적으로 마무리하고 모처럼 휴가를 가지게 되었다.

미국 텍사스주 달라스의 카펠지역은 전향적인 남부 중산층의 거주지로서 고즈넉한 주변환경에 체육관, 산책로가 잘 구비되어 있었고 특히 숲에 둘러싸인 야외 수영장이 있어 편히 휴식하기에는 둘도 없는 장소였다 그곳 처형댁에서 책읽고, 산책하고, 글쓰고 수영하며 한 달간 모처럼의 긴 휴가를 보냈다. 그 처형댁 거실 벽난로 위에는 아주 오래된 감사패가 하나 장식되어 있었는데, 내용은 교회 건축 당시에 필요한 건축물자를 미군부대에서 지원받아 큰 도움을 받은데 대한 감사표시로 의정부 성암교회에서 지원을 중개한 처형에게 증정한 것이었다.

처형이 근무했다는 '11공병대' 는 금오동의 미군기지 '켐프 에세이욘' 을 한국인들이 부대명으로 부르던 명칭이다. 당시 미군 부대에 군속으로 근무했던 한국인들은 자신이 근무하는 부대를 11. 39 등의 약칭으로 불렀는데, 11은 '켐프 에세이욘', 39는 역시 금오동의 '캠프 시어즈' 를 일컫는 속칭이었다.

나의 유년 시절 의정부는 말 그대로 미군주둔지였다. 우리들은 의정부의 미군 주둔지들을 '군단(캠프 레드클라우드)', '비니루회사(캠프 홀링워터)', '공병대(캠프 에세이욘)', '기름부대(캠프 시어즈)', '비행장(캠프 라과디아)', '뺏뽈(캠프 스탠리)'라는 속칭으로 불렀었다.

당시 내가 다니던 '양주국민학교'학부형의 거의 절반이 그 미군 부대의 근무자들이었고, 이와 함께 우리학교에는 여러 명의 '아이노꼬', 즉 혼혈아들이 있었다. 그 아이노꼬 중에 정말 예뻤던 미자를 동창들이 모이면 지금도 기억하곤 한다. 우리들 모두 은근히 좋아했던 그 미자는 졸업도 하기 전에 미국인 아버지를 따라 미국으로 이사를 가버려 모두가 속앓이를 했었다.

어쩔 수 없이 우리의 유년은 의정부에 주둔하는 미군들과 얽혀있었다 당시 두 개 뿐이었던 의정부의 교회에서는 크리스마스 때마다 유희팀을 조직하여 미군부대로 공연을 갔었고, 부활절 연합예배도 캠프 레드클라우드 연병장에서 드리던 기억이 난다.

레이션이라 불리던 각종 전투식량을 포함해서 미제 과자와 음료, 옷, 학용품, 그리고 '부대고기'라 불리던 칠면조 고기, 소고기와 쏘세지, 양주와 담배, 통조림들이 여러 가지 경로로 의정부 시내에 다량으로 유출되고 또 각지로 팔려갔다. 설이나, 추석보다는 미국 독립기념일, 추수감사절, 크리스마스가 더 명절답게 흥청거렸고 미군의 유흥시설도 상당하여 주둔지 근처마다 특수 관광이 돈을 몰고 다니는 상황이었다.

세월이 흘러 미군은 떠나고 주둔지들이 반환되어 그 땅을 시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다시 개발하고 있는 오늘의 상황에서 '부대고기', '부대찌개'를 '부끄러운 음식문화'로 규정하는 일부의 시각이 있는 반면, 먼 이국으로 이민가 살면서도 미군들로부터 받은 도움을 기억하며 벽난로 위에 낡은 감사패를 간직하는 손길도 있음을 함께 인정하자.

이와나미(岩波)문고본으로 '조선민요선'을 출판하여 선적인 인기를 끄는 동시에 강한 민족의식을 드러낸 수필가 김소운(金素雲)이 해방 후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탄압 받게 되자 그의 탁월한 일본어 실력과 문학적 재능이 정치적으로 억압당하는 것을 안타까워한 한 일본인 친구가 그에게 일본으로의 망명과 귀화를 권유하자 그는 목근통신(木槿通信)을 통하여 이런 답변을 보낸다.

“나의 어머니는 문둥이 일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나는 그 어머니를 클래오파트라와 바꾸지는 않겠습니다. 비록 서걱대는 앙금이 있더라도, 역사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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