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어서도 참군인, 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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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참군인, 채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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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3.12.16 1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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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강정 발행인



오늘날 우리나라가 세계 속에서 우뚝 솟아있는 것은 그 숱한 고난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쳐 이겨내고 지금에 와 있는 것이다. 눈물 나는 수많은 시련과 한(恨)의 역사가 우리에게 있었다.

맥아더 장군이 한국전쟁에서 폐허가 된 서울을 보면서 앞으로 이 나라가 다시 개화해 일어나는데 100년 이상이 걸릴 것이라고 추측한 바가 있다.

‘죽어서도 참군인, 병사들 곁에 잠들다’11월 25일 노환으로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을 지낸 채명신 예비역 중장 (향년 87세)이 별세했다.

고인은 황해도 곡산 출신으로 평양사범학교를 나와 교사로 일하다“함께 일해보자”는 김일성의 손을 뿌리치고, 1947년 월남했고, 그 이듬해 육군사관학교의 전신인 조선경비사관학교(육사 5기)에 들어가게 되었고, 6·25전쟁이 발발하자 20대에 중대장으로 참전해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백골부대 단장, 5.16 국가재건최고회의 감찰위원장 등을 맡았으며, 1965년 초대 주월 한국군사령관에 임명돼 3년 8개월간 월남파병부대를 지휘했다.

그는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을 반대하며 언론인터뷰에서 “1972년 초 대구에서 박 전 대통령을 만났다”며 “여러차례‘각하가 스스로 정권을 연장하겠다는 말은 하지 말라’,‘장기집권은 각하를 죽이는 길이다’라고 말했지만, 박 전 대통령은 작별인사도 하지 않고 떠났다.” 라고 떠올렸다.

그 해에 그 댓가로 대장을 못 달고, 중장으로 군복을 벗게 됐다. 전역 후 그는 스웨덴, 그리스, 브라질 대사를 역임했으며, 6.25참전 유공자회장과 대한민국 월남전참전자회 명예회장으로 활동하셨다.

베트남전에서 그는 부하를 내 몸과 같이 아끼고 사랑했다. 전선에서 부상자가 생기면 어김없이 헬기로 날아갔고, 전투모 쓰기를 거부하며 죽음을 두려워 않는 용기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병사들의 죽음 앞에 늘 눈물 흘리고 가슴 아파하셨다.

그는 퇴임 후 늘 병사들 곁에 묻히고 싶다고 하였고, 그 유언이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졌다. 장군이 사병묘역에 묻힌 사례가 역사상 처음이며, 장군묘역은 26.4cm2(약 3평)으로 안장이 가능한데, 사병묘역은 3.3m2 로 화장을 해 안치해야 한다.

자신의 영달이 아니라 국가와 지도자의 안위를 걱정하며 사병들의 눈물을 닦아주고 같이 울었던 장군님의 돌아가신 소식을 들으며 가슴이 찡하게 울린다.

객관적인 사실과 설득력으로 최고의 권력자 앞에서도 그분을 위해서 바른 말을 하셨던 분이셨다. 권력과 자리만 높아진다고 존경스럽지는 않다.

온갖 이익을 다투고 권력과 자리를 위해 다투는 세상이지만, 각자의 위치에서 사명과 본분을 다하는 분들이 늘어나면 우리 사회는 분명 한층 더 밝고 선진화될 것이다. 다시 한 번 채 장군님의 별세를 애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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