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주(吉州)
상태바
길주(吉州)
  • 홍정덕
  • 승인 2013.03.04 09: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 정 덕 한북대학교 평생교육원 교무부장

고려시대부터 시행된 지방행정 조직인 도(道)는 ‘방면(方面)’이라는 의미를 가져 왕이 상주하는 도성인 경(京)과 왕의 직할지인 기(畿)를 합친 수도, 즉 ‘경기(京畿)’로 올라오는 경유지역을 뜻했다. 따라서 도의 이름은 해당 지역의 대표 고을의 이름을 따서 지었으니 강릉(江陵)과 원주(原州)를 따서 강원도(江原道), 전주(全州)와 나주(羅州)에서 한자 씩 따서 전라도(全羅道), 평양(平壤)과 안주(安州)에서 평안도(平安道) 등으로 명명(命名)됐었던 것이다.

조선 태조 때 영흥(永興)과 길주(吉州)의 이름을 따서 영길도(永吉道)라 했으나, 1416년(태종 16) 함주(咸州)를 함흥부(咸興府)로 승격시켜 관찰사(觀察使)의 본영을 둠으로써 함흥과 길주의 이름을 따 함길도(咸吉道)라 고쳐, 이때 8도가 갖추어졌다.

1467년(세조 13)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으로 1470년 함흥부가 함흥군으로 강등되고 관찰사 본영을 영흥부로 옮김에 따라, 영흥부와 안변도호부(安邊都護府)의 이름을 따서 영안도(永安道)가 됐다 1509년(중종 4)에 다시 함흥부와 경성도호부의 이름을 따서 함경도가 됐다

따라서 함경도의 옛 이름 중 하나인 ‘함길도(咸吉道)’는 길주(吉州)에서 한 글자를 딴 것이니 길주는 북관(北關)의 큰 고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길주는 우리 의정부, 양주 지역과는 깊은 인연이 있다. 세조(世祖) 년간에 일어난 ‘이시애의 난’의 중심지가 바로 길주였고 이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최대 수훈자가 바로 동두천 출신의 어유소(魚有沼) 장군이다.

임진왜란 당시에는 의정부의 정문부(鄭文孚)장군이 길주를 중심으로 왜장 가토오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일본군 3000여명을 도륙하는 ‘북관대첩(北關大捷)’을 이루어 냈다. 임진왜란 전체를 통틀어 최대의 전과였고 이 전투로 말미암아 왜적에게 점령된 함경도 전체가 탈환되는 쾌거를 이루었다.

당시 정문부 장군의 전공을 숭앙했던 길주 군민들이 길주군 임명(臨暝), 북관대첩의 현장에 세운 ‘북관대첩비(北關大捷碑)’는 러일전쟁 당시 일본으로 반출되어 야스구니(靖國神社) 뒷뜰에 방치됐다가 한국에 반환되어 북한으로 돌아가던 중 의정부 송산동의 정문부장군 묘소에서 장군의 혼령과 만나 애틋한 하룻밤을 지내고 현재는 본래의 위치인 북한 김책시 임명리에 복원돼 있기도 하다.

북한이 3차 핵실험을 했다. 원자폭탄을 경량화, 소형화하고 폭발력을 늘려 실제로 무기화하는 일에 중대한 진척이 있었다고 전하며 현재 국제사회는 이를 막지 못한 채 뒤늦은 대책 수립에 우왕좌왕하고 있다. 그 핵실험의 현장이 바로 길주의 풍계리이다.

조국의 위기를 건져 낸 우리 지역의 두 장군, 바로 길주에서 싸웠던 어유소(魚有沼) , 정문부(鄭文孚)의 혼령이 오늘 핵전쟁의 위기에 처한 조국을 바라본다면 얼마나 착잡하고 안타까우실 것인가?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