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묘지명이 밝힌 그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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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묘지명이 밝힌 그날
  • 한북신문
  • 승인 2026.08.27 0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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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문화원 양주학연구소장
홍정덕 논설주간·양주문화원 양주학연구소장

2006년 중국 낙양의 골동품 시장에는 특이한 비석 하나가 출품되었고 이 비석에 적힌 내용이 2007년 중국 길림성이 발간하는 격월간 역사잡지 <동북사(東北史誌)>에 소개되면서 우리 고대 사학계에 큰 파문을 불러일으키게 된다.

660년 백제 멸망 당시 최후의 전투지였던 공산성 함락을 둘러싼 일부 논란이 다시 재론된 것이다.

문제의 비석은 무덤 안에 넣어 무덤의 주인이 누구인지를 후세에 전하는 지석(誌石)이었는데 이 지석은 당의 수도 장안의 귀족 전용 묘역인 고양원에 묻힌 백제의 유장(遺將) 예식진의 무덤에서 발견되었는데 총 18행 289자로 구성된 크지 않은 비석이다.

지석의 비문은 ‘그가 백제의 웅천 출신으로 당나라 황제의 친위군인 좌위위(左威衛)의 대장군이라는 고위직을 지낸 후 58세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어떻게 당이 멸망시킨 나라 백제의 유민이 황제 친위군의 지휘관이 될 수 있었던 것일까? 열쇠는 당의 역사책인 구당서. 신당서에 있다.

신, 구당서에는 백제의 대장군 예식이 의자왕과 ‘함께’ 당군에 항복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함께’라는 표현이 바로 ‘붙잡아’라는 의미로 예식은 최후 항전을 위해 공산성으로 이동해 온 자기의 임금 의자왕을 체포하여 당에 항복하였다고 이해할 여지가 있는 기록이다.

그렇다면 예식진과 예식은 동일인인가? 그래야만 백제의 유민 출신이 황제의 친위군을 지휘하였다는 지석의 기록이 타당성을 갖게 된다.

그리고 이 의문은 2010년과 2016년 예식진의 아들 예소사와 예소사의 장남 예인수의 묘지명이 잇달아 발굴되면서 해결되었다.

예석진의 손자 예인수의 묘지명에는 ‘이에(예선의 아들) 예식진 대에 이르러 대대로 관직을 이어받으며 조상의 어짊을 본받았다. 당(唐)이 천명을 이어받고 무도한 자(백제)를 토벌하려 동정하자 (예식진은) 그 왕을 이끌고 고종황제(이치)에게 귀의하였다. 이에 좌위위대장군에 배수되었고 내원군 개국공에 봉해졌다’는 기록이 선명히 나타난 것이다.

의자왕은 근위군을 거느리고 부소산성보다 수성전이 용이한 공산성으로 이동하여 최후의 결전을 준비하지만 공산성주 예식진의 배반으로 전투는 허망하게 망국으로 종결되고 만 것이다.

국망의 위기에서 정작 적은 외부가 아닌 내부에 있었다. 최전선을 방어하는 대한민국 육군 제1군단과 3군단에 이어 해병대까지 휴전선 최전방을 방어하는 병력 전체에 공용화기는 물론 개인화기까지 실탄을 뺀 빈총으로 경비와 방어에 임하도록 지침을 하달하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그 명령을 내린 군단장이 직무에서 배제되었다고 한다. 이 사안이 그걸로 끝날 일인가? 1군단, 3군단, 해병사단 등 전방 방어부대 전체에 이와 같은 명령이 내려졌다면 이는 단위 지휘관이 단독으로 결정한 사안이 결코 아니다. 그 윗선 군령 담당자의 결정이 있어야 하는 엄중한 병란이다.

반드시 끝까지 책임 소재를 밝혀 군법의 엄정함을 보여주고 내부의 적을 소탕해 내고 나서야 전체 군의 위상과 사기가 회복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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