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조선 왕조의 설계자로 자부한 정도전(鄭道傳)은 새 나라 조선이 제도와 법률로 통치되는 신권(臣權) 중심의 재상국가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동시에 조선 왕조의 개창자를 자부한 이방원(李芳遠)은 조선이 국왕이 전제하는 왕권(王權) 국가가 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했다. 정몽주(鄭夢周)를 타살하며 부왕 이성계의 눈 밖에 난 이방원은 자신의 어머니 한씨가 정통 왕비이며 강비(康妃)는 첩이므로 그의 아들들은 모두 왕위 계승권이 없는 서자(庶子)로 여겼고 조선 개국 이전에 훙거한 한씨는 살아 생전에는 왕비였던 적이 없었기에 개국 후 정식 왕비로 책봉된 강비는 자신의 아들들이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여겼다.
이성계가 새 왕조를 열고 겨우 8년 만에 아들이 아버지를 축출하고 형이 동생과 매제를 죽이는 참혹한 왕자의 난이 발생한 원인이다. 부친을 왕위에서 폐출하고 수도를 다시 개경으로 환도한 혁명세력은 1400년 정종 2년 1279년(고려, 충렬왕 5) 이래 국정의 최고 의결 · 집행기관으로 자리 잡은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를 개편하여 기존의 의결기능과 문하부(門下府)의 백관 서무를 포괄하는 국정의 최고 의결기관으로 만든다.
이는 허수아비 정종을 앞세우고 실질적으로는 국정의 실권을 장악한 태종이 자신을 중심으로 하는 새 권력기구를 구성한 것이었다. 그러다 1401년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양위 받은 태종은 즉위년 7월 이미 유명무실해진 문하부를 혁파하여 이를 도평의사사에 종합한 의정부를 만들어 명실상부한 조선시대 최고의 정치기구로 개편되었다.
이후 의정부가 육조를 지휘하면서 국정운영을 실질적으로 주도하게 되는데 의정부가 육조(六曹)의 업무를 지휘하고 종합하여 국왕과 협의하는 이른바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러나 새 왕조는 왕권 국가여야 한다는 태종의 신념은 결국 이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를 폐지하고 육조에서 각 해당 업무를 국왕에게 직계(直啓)하여 결재를 받는 이른바 육조직계제로 변경한다. 이로써 왕권은 획기적으로 강화되고 의정부는 유명무실한 명의 기관으로 전락한다. 명백한 정치적, 문화적 쇠퇴 현상이다.
더 중요한 것은 이 육조직계제는 국왕에게 과중한 정치적 부담을 부과하게 되었다는 것이다.역대 조선 국왕 중 가장 성실히 국정을 감수하였다는 세종조차 이 육조직계라는 무거운 정치 과제를 감당하지 못하고 다시 기존의 의정부서사제(議政府署事制)로 되돌아 간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육조직계제가 다시 부활한 것은 조카 단종으로부터 왕권을 강탈한 세조 때의 일이다. 상왕 복위를 명분으로 끊임없이 반발하는 신하들을 제압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국무회의를 공개하며 장관을 비롯한 담당 고위 공무원들을 닦달하더니 이제 그 국무회의 참석자를 각 부 장관에서 실(室). 청(廳)장으로 확대하였다.
이른바 만기친람(萬機親覽)이다. 논의와 협의는 없어지고 대통령의 방침 시달과 이의 관철만이 주요 의제로 대두될 것이 명약관화하다. 질병이 심해져 영응대군의 사저로 옳긴 후에도 훙거 며칠 전까지 정사를 돌보았던 세종조차 만기친람인 육조직계를 서사제(署事制)로 되돌린 그 의미를 곰곰이 살펴볼 필요가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