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景宗)은 어려서부터 잔병치레가 많았고 몸집이 비만하여 열과 화가 많아 늘 병치레에 시달렸다.
즉위 4년 차에 이르는 1724년에는 여름부터 소화불량과 설사가 겹치며 8월 내내 식사를 못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였는데 음력 8월19일 저녁 세제인 연잉군이 올린 게장과 감을 먹고는 급격히 상태가 악화 되어 24일 의식불명 상태에 빠진다. 이에 연잉군은 어의 이공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인삼과 부자를 사용할 것을 강권하였고 이 처방은 경종을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가 결국 8월25일 창경궁 환취정에서 승하하게 된다.
연잉군은 즉위와 동시에 형 경종을 독살하고 왕위에 올랐다는 혐의를 피할 수 없게 된다. 지속적으로 희빈 장씨와 경종을 지지하던 소론은 즉각적이고 조직적인 반발에 들어가고 마침내 이인좌의 난이라는 전국 규모의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왕권에 치명적인 하자를 떠안게 된 영조는 이와 같은 상황을 탕평책을 통한 소통, 엄격한 자기 절제, 적극적인 민생 행보로 돌파하고자 하였고 이와 같은 그의 노력은 상당 부분 성과를 거두어 후일 역사가들은 영조를 조선의 르네상스를 연 현왕으로 추앙하게 된다.
그는 금주령을 내리고 스스로도 술을 입에 대지 않는 것은 물론 옷을 수선해 입고 육식을 거의 하지 않으며 근면히 정사를 살피고 각종 구폐를 개혁하는 데 솔선하며 왕도를 실천해 나갔다.
그는 일찍 아들 효장세자를 잃고 나서 겨우 얻은 사도세자 역시 자신과 같은 절제와 근면 학구와 모범의 삶을 체득하여 자신과 같은 왕도의 실천자가 되기를 바랐고 이를 엄격히 강요하였다. 그러나 부왕의 지나친 훈육은 심약한 아들 사도세자로 하여금 부왕을 만날 때마다 극도로 주눅들게 만들었다.
영조는 세자가 잡학과 무예에 능하다는 사실로 그를 학업에 게으르다고 심하게 질책했고 그의 비만한 체격을 두고 대신들 앞에서 “이 아이의 배 좀 보라”라고 말하는가 하면 “지난번 가마 탈 때 보니 가마가 좁아서 세자가 탈 수 없었다. 그 가마는 내가 동궁 시절에 타던 것이다.”라고 힐책하기도 하였다.
아버지를 볼 때마다 힐책당하고 야단맞는 상황은 세자를 심리 불안을 넘어 극심한 조울증으로 몰아갔고 마침내 정신 질환을 유발하여 마침내 이런 패륜아에게 왕위를 넘기면 나라 자체가 위험하다는 판단 아래 아들을 아버지의 손으로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조선 왕조 사상 가장 어두운 사태를 야기시켰던 것이다.
대통령이 전국에 중계되는 가운데 장관을 비롯한 고위 행정관료들을 불러 국정을 보고받는 자리를 열고 그들을 심하게 야단치는 장면들을 연출하고 있다.
담당자들에게는 극심한 긴장과 불안의 자리일 것이 명확한데다 대답 여부에 따라 온 국민 환시 아래 심한 질책을 받게 되고 또 매스컴은 이를 연일 집중보도하고 있으니 정말 죽을 맛이겠다.
의도도 알겠고 어느 정도의 집중 효과도 있으리라만 그 효과가 반드시 긍정적이라고만 볼 수 없는 것이 장면의 배경으로 눈을 돌리면 문정전 뜰에 놓였던 사도세자의 뒤주가 떠오르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