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79)무학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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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79)무학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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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8.03.17 1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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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이학박사·前 신한대 중앙도서관장·논설위원
호원동에는 무학골이 있다. 무학골은 배나무골 너머 동쪽 골짜기로 예전에 무학굴이 있어서 붙여진 지명이다. 무학굴은 무학대사가 임시로 머물던 굴이라 하여 붙여졌다 한다.

무학골은 예순 비구니(禮順 比丘尼)가 춘추좌전(春秋左傳)과 효경(孝經)을 간행한 집터에서 약 300미터 정도 떨어져 있으며, 이 골짜기에서 이성계가 왕이 된 후에 무학대사가 찾아와서 대화를 나누었다는 전설이 서린 돼지바위가 있다.

효경을 간행한 집터는 1635년 병자호란이 일어나기 한해 전에 예순 비구니가 춘추좌전과 효경을 직접 번역하여 국문으로 언해를 만들어 출판한 곳이다. 예순 비구니는 녹양동에서 이귀(李貴)의 딸로 태어나 훗날 반정동지가 된 김자점(金子點)의 동생 김자겸에게 출가하였으나 남편이 일찍 죽고 과부가 되었다가 회룡사의 여승이 되어 불문에 입문하여 비구니가 되어 니명을 예순(禮順)이라 불렀다.

동평위공사견록(東平尉公私見錄)’은 효종의 다섯째 사위인 동평위 정재윤이 보고 들은 이야기를 기록한 책으로 <연평 부원군의 딸이 아버지를 구하다>라는 제목으로 아래와 같은 글이 실려 있다.

예순 비구니는 자주 궁중에 드나들게 되었는데 궁인들이 예쁘고 글 잘하는 이 여승을 공경하고 따랐다. 특히 광해군의 애첩 김상궁이 이 여승을 무척이나 총애하면서 자주 불렀다. 김상궁으로 말하면 원래 선조에 의하여 임란 때 의주 파천 길에 발탁되어 총애를 받다가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면서 광해군의 애첩이 되었다. 그 후 이이첨, 박승종 등과 결탁하여 매관매직 등 온갖 비리로서 재물을 모으고 권세를 부렸기 때문에 광해군 난정의 가장 큰 원흉이 되고 있었다.

반정이 일어나기 하루 전날 어떤 사람의 밀고로 반정모의가 들통이 나고 이귀 등 주모자를 잡아들이라는 왕의 명령이 떨어졌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예순 비구니는 장문의 글을 써서 아버지 이귀가 억울하게 모함을 당하고 있다는 거짓 편지와 함께 아버지 이귀의 임금에 대한 충성심을 노래한 시를 김상궁에게 보냈다. 김상궁은 그 글에 매혹되어 즉시 광해군에게로 달려가 편지와 시를 보이면서 광해군으로 하여금 이귀 등의 체포령을 철회하도록 설득하였다. 자칫 실패를 초래할 뻔 했던 반정모의는 예순 비구니의 거짓 편지와 시에 힘입어 계획대로 진행되고 다음날 새벽녘에 반정군이 창의문(자하문)으로 들이닥쳐 성공하게 되었다.

한편 예순 비구니가 간행했다는 효경(孝經)은 유가(儒家)의 주요 경전인 십삼경(十三經)의 하나다. 효도를 주된 내용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효경>이라고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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