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정부의 땅이름-64) 정주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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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땅이름-64) 정주당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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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17.08.13 17: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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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추윤 논설위원·신한대 중앙도서관장


의정부시 천보산 밑에 위치한 금오동에 가면 애달픈 전설을 간직한 비운의 의순공주와 관련된 전설이 있는 정주당터가 있다. 그리고 천보산 끝자락에는 작고 초라한 의순공주 묘가 있다. 사람들은 ‘족두리 묘’라 부른다.

최근에 위안부 문제가 한·일간 중요 관심사로 떠오르고 있는데 청나라 때도 힘없는 나라의 백성들은 똑 같은 수모를 겪어야했다니 역사는 되풀이 되는 것인가 안타깝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후 청나라에서는 조선여인들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강요하였고 왕족의 처녀까지 포함해야하는 수모를 겪어야했다.

드디어 1650년 효종원년에 청나라 구왕은 조선 공주에게 청혼을 해왔고 이때 조정에서는 이 문제로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되었다. 이때 종실의 금림군 이개윤이 자기 딸을 청나라에 보낼 것을 자청하였다.

그리하여 조정에서는 그녀를 의순공주로 정하고 사신과 시녀를 딸려서 청나라에 보냈다. 청나라로 가는 도중 평안도 정주 지역에 이르렀을 때 의순공주는 압록강을 건너기 전에 오랑캐 구왕에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는게 낫고 몸을 더럽힐 수 없다며 가파른 벼랑 아래 깊은 물 속으로 몸을 던져 자살하였으며, 시체가 떠오르지 않아 그녀가 쓰고 있던 족두리만으로 무덤을 만들어 족두리묘로 칭했다는 것이다.

이때 시행하던 노복들이 시신은 찾지 못하고 족두리만 건져와서 금오동 선영의 아버지 묘 밑에 장사를 지냈고, 이때부터 족두리묘소라 불렀다는 것이다. 나라에서는 의순공주의 충효정신을 기리기 위해서 천보산에 큰당, 작은당, 각시당을 짓고 해마다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이래서 이 지역을 정주당(定住堂)이라고 하였다.

그 후부터 마을 주민들이 이른 봄에 비명에 간 의순공주의 넋을 위안하고 풍년과 무병장수를 기원하는 제를 지낸 다음 농악대가 천보산의 큰당과 작은당 등을 왕복하면서 하루를 즐겼다. 이때부터 정주당 놀이가 우리고장의 민속놀이 겸 동제로 전승되어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에는 의순공주가 청나라에 가다가 자살하지 않고 구왕에게 일단 시집가서 살다가 말년에 왕명으로 귀국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죽게되자 장례식을 치르게 하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다만 추측은 의순공주가 압록강을 건너기전 다시는 고국 땅으로 못돌아 올것으로 예상하고 족두리를 벗어서 주었고 이를 본 어머니가 공주가 죽은 것으로 족두리를 묘에 묻고 정주당에서 명을 빌었던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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