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쟁(政爭)
상태바
정쟁(政爭)
  • 한북신문
  • 승인 2024.02.26 07:3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659년 병자호란의 참상과 삼전도의 굴욕을 겪고 청의 수도 심양에 볼모로 끌려가 갖은 수모를 당한 후에 겨우 돌아와 왕위에 올라서는 평생 북벌을 꿈꾸던 비운의 임금 효종이 승하한다. 그러자 그의 국장 절치를 놓고 그의 계모 즉 아버지 인조의 후비였던 자의대비의 복상(服喪) 문제가 정치적 쟁점으로 떠오른다.

당시 집권세력이었던 서인의 종장 송시열은 효종이 인조의 차자였고 자의대비는 이미 장자 소현세자의 3년상을 치렀으므로 주자가례의 규정을 근거로 중자의 예를 적용하여 ‘기년복(朞年服)’ 즉 1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다.

이에 정권 탈취를 노리던 허목, 윤휴 등의 남인은 왕위를 계승하였으면 비록 차자라 하여도 당연히 적장자(嫡長子)로 대우하여야 한다는 경국대전의 규정을 근거로 맹렬한 이의를 제기하며 ‘참최복(斬衰服)’ 즉 3년상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게 된다. 이른바 1차 예송 ‘기해예송’이다.

이 예송은 어린 현종이 당대 권력의 편에 서면서 패지가 된 남인 허목 등은 유배에 처해 지는 것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15년이 지난 1674년(현종 15년) 효종비 효숙왕대비(인선왕후)가 돌아가자 역시 그녀의 시어머니 격인 인조의 후비인 자의대비가 어떤 복상을 치러야 하는가를 따지는 이른바 2차 예송 ‘갑인예송’이 벌어지게 된다. 서인은 1차 예송과 같이 효종의 신분을 차자로 하고 주자가례에 따라 9개월복 즉 대공복(大功服)>을 주장하였는데 남인들은 국조오례의의 규정에 따라 “장자부이던 차자부이던 어머니는 모두 기년복, 즉 1년 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여 이를 관철시킨다. 문제는 서인들의 주장 즉 효종은 차자라는 주장은 결국 효종의 왕통을 부정하는 것으로 되어 결국 역률(逆律)이 적용되면서 송시열이 사사되고 정권 역시 남인으로 넘어가게 된다.

예(禮)는 왕가와 반가를 물론하고 사대부는 반드시 철저히 수행하고 적용해야하는 철칙임에 틀림이 없다.

문제는 이를 정론(政論)으로 끌어들여 상대 당파를 제압하고 축출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데에 있다.

당연히 상대 당의 주장에도 일리가 있을 터이요, 우리 당의 주장에도 허물이 있을 것이니 완벽하고 완전한 논리는 그 어느 곳에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릇 정론(政論)이라면 크던 작던 토론과 협의와 논의가 필요한 이유이다.

논리를 독점하고 이를 온전히 관철하여 한다면 이는 바로 독재이니 이를 타기(唾棄)해야 하는 것은 모두가 납득하고 적어도 다수가 동의하는 주장이라야 비로소 정책으로 채택되고 실현되어야 그나마 실수를 최소화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당론은 전제 왕권을 견제하고 중론을 모아 협의를 통해 원만한 정책을 채택하고 이 과정에서 자기 당파의 역량을 개발, 강화할 수 있다는 장점의 소지를 지녔음에도 결국 당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는 망국의 한 원인이라는 극단적 평가를 받아야 하는 이유가 이 독단과 배척에 있다.

이제 다시 선거의 계절을 맞는다. 우리는 또 극단을 달리는 주장과 논리의 늪에 빠지게 될 것이고 그 극단의 하나를 마지못해 차선으로 선택해야만 하는 상황에 몰리게 될 듯하다. 아직 우리 정치는 조선 후기에 아니 어쩌면 그보다도 더 못한 상황에 머물러 있는 것은 아닐까?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