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치열했던 소통
상태바
그 치열했던 소통
  • 한북신문
  • 승인 2023.11.16 08: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영조(英祖)가 죽고 그 뒤를 이은 세손(世孫)이 즉위식에서 내뱉은 일성(一聲)은 바로 “나는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아들이다”였다. 영조는 자신의 위를 이을 세손이 반대파인 노론 벽파로부터 “죄인 사도세자의 아들”이므로 “왕위 계승에 적합하지 않다”라는 시비에 걸릴 가능성과 마치 연산군처럼 그 부친 사도세자의 억울한 죽음을 앙갚음할 가능성 두 가지를 모두 염두에 두고 세손을 그 큰아버지 되는 <효장세자(孝章世子)>의 아들로 입적하여 두었다. 그러나 정작 그가 왕위에 오르는 바로 그날 이런 선언이 나왔다는 것은 이후 조선의 정치가 만만치 않은 변화의 바람을 타게 될 것임을 직언하는 신호에 다름이 아니었다.

그러나 새 임금 정조를 둘러싼 권력 구조는 결코 그에게 우호적이지 않았다. 여전히 정치권력은 기존의 노론 벽파에 장악되어 있었고 특히 훈련도감을 비롯한 5군영이 확고하게 그들에게 예속되어 있었다. 그는 채제공(蔡濟恭)을 비롯한 소수 근기(近畿) 남인(南人)들의 지지 속에 기존의 기득권을 천천히 극복해 나갔고 새로 <장용영(壯勇營)>을 창립하기는 하였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수세를 면치 못하였다. 수도를 한양에서 수원으로 옮기려 했던 것도 기득권 노론세력을 혁파하기 위한 안간힘이었다.

최근에 발견된 그의 편지들은 그간 그가 노론 벽파세력을 강압하며 자신의 개혁정치를 추구하였다는 통설을 전면 부인하는 중요한 자료들이다.

그가 노론의 핵심이자 자신의 정적인 심환지(沈煥之)에게 보낸 편지에는 그가 진심을 다하여 자신에게 적대하는 기득권 세력과 어떻게 소통하였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경은 이제 늙어서 머리가 허옇다. 그런데 매번 입조심을 못해서 문젯거리를 만드니 경은 정말 생각 없는 늙은이다. 너무너무 답답하구나. 앞으로 경을 대할 때는 나 역시 입 다무는 것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으니 정말 우습게 되었다. ‘이 떡 먹고 이 말 말아라!’라는 속담을 명심하는 게 어떤가?”

○… “지금 경의 꼴은 참으로 ‘장 80대’에 해당한다 하겠다. 경이 강력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여주지 않으니 내가 믿을 수가 없다. 소심해야 할 때 소심하고 용기를 낼 곳에서는 용기를 내야 하는데, 나서서 일을 해야 할 때 오히려 머뭇거리고 두려워 하니 부끄럽지도 않은가.”

○… “내가 사류(士流)의 두목이니, 지금 사류의 전형을 구한다면 형편상 경을 먼저 꼽을 것이다. 경에게 상처를 주지 않을까 두려워하는 나의 마음은, 서야(徐也)에게보다 열 배가 넘는다.”

왕은 자신에게 대립하는 정적 심환지(沈煥之)에게 거의 매일 비밀 편지를 보내 그날의 정치를 의논하며 의견을 구하고 때로는 야단치고 때로는 당부하며 심지어는 내일 있을 인사문제에서 먼저 이렇게 건의하라는 지시를 내리며 그와 소통하고 있다.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뤄낸 정조의 정치 내면에 존재하는 놀라운 그의 통치술의 일면이 이에서 드러난다.

대통령의 임기도 어느 듯 절반에 다가서고 있다. 그런데 아직도 제일 야당의 대표와 만난 적이 없다. 비록 그에게 반기를 든 이도 있고 대통령과 다른 의견을 가진 이들도 있고 누군가의 구속과 재판을 방해할 목적으로 국회를 편법으로 운영하는 참담함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통치자가 믿어야 할 것은 국민이고 두려워해야 할 것은 역사의 평가이다.

진실로 대통령은 정조의 치열했던 소통을 배우고 또 배워야 한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