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을 끝내고 싶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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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통을 끝내고 싶은 선택
  • 관리자
  • 승인 2018.09.03 15: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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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희주 논설위원·글과생각 대표

얼마 전 노회찬 의원의 비보에 큰 슬픔과 아픔의 시간을 보냈다. 너무도 강인하고 유쾌한 분이라 생각했기 때문에 그 충격은 더 컸던 것 같다. 사건당일 많은 사람들이 일상의 업무를 손에서 놓고 안타까운 죽음에 가슴 아파했다. 그러면서 또 한편으로는 무심결에 들리는 소리가 귀에 걸려 서글펐다.

잘못한 일이 있어 자살한 사람에 대해 너무 호들갑이라 한다. 연일 노회찬 의원의 사망과 관련된 기사와 방송이 이어지자 언론이 편파적이라고 말한다. 한 사람 죽음만 저리 떠들고 있으니 국가를 위해 봉사하다 불의의 헬기사고로 목숨을 잃은 7명의 젊은이들은 잘 다뤄지지 않는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장병들의 죽음은 참으로 안타깝다. 이 세상 어느 목숨이 귀하지 않고 안타깝지 않은 죽음이 있을까?

노회찬 의원을 만난 적이 있느냐, 노회찬 의원이 과거 어떤 활동을 하며 젊은 시간을 보내고 오늘에 이르렀는지 사실 관계를 살펴 알고 있는 것이 있느냐, 이런 질문에 자신 있게 그렇다고 사람들은 답하지 못한다. 그저 언론과 주위 사람들로부터 들은 내용이 전부라고 답한다. 일면식도 없이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해 너무 함부로 말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의 품위와 삶의 마지막을 대함에 갖춰야 할 살아남은 자의 예의를 떠올린다.

우리는 너무도 소중하고 아까운 정치자산 하나를 잃었다. 유머와 해학이 넘치는 분으로 우리 사회의 억압과 비틀림을 웃음으로 꼬집었던 분이었다. 어느 특검이나 정치적이지 않은 경우는 없지만, 특히 이번 특검에서의 성과라는 것이 애먼 정치인 하나를 다시 볼 수 없게 한 것이 전부인 듯하다. 진보와 보수의 문제로 편을 가르고 죽음을 미화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생명에는 경중이 없으며 어느 생명이나 소중하고 나름의 의미가 있다. 그러나 한 개인이 이 사회에 어떤 기여를 하고 그 삶과 의미를 어디에 두며 어떤 상징성을 갖는가 하는 것은 각기 다르다. 더구나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경우, 그 이유를 찾아 문제를 해결하고 아픔을 치유하는 것이 순서다. 삶을 끝내고 싶은 것이 아니라 고통을 끝내고 싶은 선택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성인(聖人)이 아니고서야 이 세상을 살아가는 인간이 허물이 없을 수는 없다. 그럼에도 스스로 기준을 정하고 현실에서 이를 지켜나가려 고군분투하며 치열하게 삶을 살아온 모습에 우리는 경의를 표한다. 소소한 실수를 침소봉대하여 실패자로 낙인찍고 그 삶을 폄하함에 분기를 느낀다.

투르니에는 순수성에 대한 강박관념 때문에 자기 주변에 파멸의 씨를 뿌린다고 했다.” 보다 더 높은 기준을 정하고 삶에 적용하며 숙명자살을 암묵적으로 강요하고 있지는 않았는지 우리 사회가 반성해볼 일이다. 믿었던 이들의 비난과 지금까지의 삶이 부정당하는 과정 속에 자기 보존능력이 떨어지고 소속된 곳에서조차 배척당하는 듯하고 짐이 된다는 느낌을 받을 때, 개인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자살이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사회적인 문제이자 공동체의 책임이기도 한 이유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고 적극적으로 이웃의 고통을 경청하고 우리가 뭔가 할 수 있는 기회는 없었는지 관심을 갖고 살펴보아야 한다. 그저 고통을 끝내고 싶었던 우리의 이웃이 그들의 삶을 끝내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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