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원균, 기록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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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과 원균, 기록의 리더십
  • 권원기
  • 승인 2017.07.03 0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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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원기 신한대 공법행정학과 교수


이순신과 원균, 우리나라 사람이라면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한 분은 만고의 영웅으로, 다른 한 분은 어리석은 전술가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왔다. 두 사람의 관계도 애증의 관계로 널리 알려져 있다. 동 시대에 나라를 위해서 헌신한 두 장수가 이렇듯 극과 극의 평가를 받는 일도 매우 드물다.

그러나 나라를 위한 공적평가에는 큰 차이가 없었다. 임진왜란 후 선조는 전쟁에서 세운 공을 인정하여 원균에게 선무공신의 훈공을 내렸다. 선무공신은 이순신, 권율 등에게 주어진 높은 훈공인데, 이를 원균에게도 수여한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원균에게 의정부좌찬성이라는 벼슬을 추증하기까지 하였다.

이를 두고 일각에서는 선조의 정치적 계산이라고 폄하하기도 한다. 그렇다 해도 결과적으로 이순신과 원균은 동급의 공신에 오른 것만은 분명하다. 그런데도 이순신과 원균의 후세 평가는 냉혹할 정도로 원균에게 차갑다.

칠천량 해전에서 일본군에게 완패당한 것에 대한 분노의 표출이라고 해도 가혹한 면이 없지 않다. 물론 전술적으로나 지휘 면에서 원균의 무모함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지만 칠천량 패배 이전의 원균은 나름 열심히 일본군에 맞서 싸운 장수였다.

임진왜란 전에는 두만강 넘어 여진족과의 싸움에서 여러 번 승전의 경험도 있었다. 당시 군대 내 유능한 장수로 신임 받았던 신립, 이일 등에도 버금가는 장수였다. 그러던 원균이 해전에서 능력발휘를 제대로 못한 것이 그에게 커다란 족쇄로 남게 된 것이다. 또한 라이벌치고는 너무나 강력한 이순신이라는 라이벌을 만난 것이 불행 중 불행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가정이지만, 원균도 이순신처럼 기록을 남기는 리더였다면 그에 대한 평가는 달라졌을 것이라는 확신이 든다. 즉 이순신은 객관적이든 주관적이든 낱낱이 기록을 남겼다. 군사훈련, 거북선 제조, 왜군의 동향, 국제정세 등 거시적인 면뿐만 아니라, 가족의 근황, 자신의 감정, 심지어 여자들과의 하룻밤 연애까지도 꼼꼼히 기록해두었다.

여기에 덧붙여 원균의 태도, 술 취한 후의 주사 등 그에 대한 미운 감정도 서슴없이 적었다. 자신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낸 이순신의 기록은 그의 인품을 의아하게 생각하도록 만들 수 있었다. 그러나 후세 사람들은 이러한 이순신을 인간적이라고 높이 평가하기도 한다.

흔히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러나 필자는 역사는 기록한 자의 몫이라고 말하고 싶다. 역사에 남는 것 중 가장 강력한 것은 기록물이다. 기록을 근거로 인물을 평가하고 사건을 재조명하고 과거의 상황을 이해한다.

이순신과 원균의 리더십은 보기에 따라서는 둘 다 용장이며, 나름 나라를 위해 분전하다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사후평가가 극명하게 달라지는 이유는 기록의 유무가 크게 작용한다.

마찬가지로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시간이 흐르면서 역사로 남는다. 지금이야 누구라도 기억할 듯 보이지만 몇 십 년만 지나면 금새 잊혀지는 역사가 되고 만다. 그래서 기록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기록하는 중간 중간에 자신의 실수를 피드백 할 수 있고 보다 개선된 상황판단과 인격도야를 할 수 있다. 이는 개인뿐 아니라 국가에도 적용된다. 가끔 국정을 총괄하는 청와대에서조차 기록물이 없어졌느니 하는 어이없는 일이 벌어지곤 한다.

이순신 장군이 알았다면 크게 경을 칠 짓이다. 국가든, 회사든, 심지어 가정에서조차 기록하는 자의 리더십이 실패하는 경우는 거의 없다. 나아가 역사적 평가도 기록하는 자의 편에 선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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