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원평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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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원평전투
  • 홍정덕
  • 승인 2017.06.1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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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평양이 함락되자 고니시, 구로다가 지휘하는 왜군은 한양으로 패퇴하고 정문부 의병에게 거듭 패전하며 심각한 압박을 받고 있던 가토오의 왜군 역시 함경도, 강원도를 포기하고 한양으로 퇴각해 왔다.

평양성 수복 전투의 승리로 방심한 채 소수의 병력으로 왜군을 추적하여 내려오던 이여송(李如松)이 벽제관(碧蹄館) 전투에서 패배하고 후퇴해 버리자 남진하는 명군과 합세하여 한양수복 전투에 동참하기 위해 행주산성(幸州山城)에 대기 중이던 권율(權慄)의 조선군이 고립되었고 1만이 채 안되는 조선군에게 3만의 병력을 집중하여 공격해온 왜군을 격파한 전투가 바로 행주대첩이다.

이 싸움에서 수천 명의 병력을 상실하는 대패를 당하고 왜군은 모든 병력을 거두어 한양 도성 방어에 총력을 기울이게 되는데 5만 여명의 왜군이 한양에 집결하자 당연히 식량을 비롯한 보급에 큰 문제가 발생하였고 왜군은 부족한 식량을 조달하기 위하여 양주 지역의 민가를 대규모로 약탈할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러한 첩보를 입수한 삼도방어사 이시언(李時言), 평안좌방어사 정희립(鄭希立), 경기방어사 고언백(高彦伯), 평안조방장 박명현(朴名賢), 조전장 박진남(朴震男)등은1593325일 저녁에 노원평(蘆原坪)과 삼각산 아래 우관동 등지에 군사를 먼저 보내 매복하게 하였다.

26일 해뜨기 전에 군사를 이끌고 누원(樓院) 냉정현(冷井峴)에 나아가 진을 친 조선군은 왜적이 노원 우관동으로 접근하자 먼저 매복해 있던 군사와 합세하여 전투를 진행하던 중 순변사 이빈의 군사와 승장(僧將) 유정(惟政)의 군사가 뒤이어 합세하니 결국 왜적은 궤멸하여 패퇴하였다. 한양 성 10리 지역에까지 추격하여 많은 수의 적을 사살하고 47급의 목을 베었다.

27일 또 왜적이 수락산으로 접근하자, 고언백 군사와 승군이 불암산성에 진치고 화살을 쏘니 왜적의 사상자의 수를 알 수 없었다. 당시 이 전투에서 왜군에게 포로가 되었다가 돌아온 군사의 말에 의하면 이번 노원전투(수락산전투)에서 왜군들이 입은 피해(화살을 맞아 죽거나 부상당한 수)는 지난 날 행주대첩에서 입은 피해보다 적지 않을 것이다라고 증언하고 있다.

한양성 수복과정에서 대규모로 왜군을 섬멸한 이 전투를 <노원평전투>라 하고 이 전투의 승리는 왜군이 한양도성에서 철수하게 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으며, 서울 동북부의 백성과 왕릉을 보호하는 큰 역할을 감당하였던 것이다.

이 노원평 전투의 무대는 노원평야(중랑천을 낀 마들평야), 우관동(우이동), 다락원(도봉동과 호원동 일대), 두험천(의정부 시내)이고, 올해 정유년은 왜의 조선 침략이 다시 재개된 재란(再亂)이 발생한 지 7주갑, 420주년이 되는 해다.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이 일촉즉발의 위기를 이어가고 있다. 우리 지역에서 외적과 싸워 강토를 지키고 민초를 보호한 중요한 전투를 보다 의미 있게 기억해야 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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