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에서 태어난 난고(蘭睾)김삿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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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주에서 태어난 난고(蘭睾)김삿갓
  • 이명수
  • 승인 2015.08.13 14: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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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명수 경기도문화원연합회 향토문화연구소장



양주고을 회암마을은 태조 이성계가 머물렀던 천년 고찰(古刹)의 회암사(檜巖寺)가 있는 곳이다.

순조(純祖)7년(1807년) 3월13일 경기도 양주시 회천면 회암리에서 권세가문인 장동김씨(壯洞金氏)댁에서 부(父) 김안근(金安根)와 모(母) 함평 이(李)씨 사이에서 2남으로 태어났다. 이름은 병연(炳淵)이라 하였고 자(字)는 성심 호(號)는 난고이며 속칭은 김립(金笠)인 것이다.

순조 11년(1811년) 12월 홍경래(洪景來)가 평안도 일대에서 일으킨 민란(民亂)은 서북인(西北人)을 문무고관에 등용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난을 일으켰다.

그해 흉년까지 들어 민심까지 흉흉한 틈을 타서 궁민(窮民)들까지 끌어 들였다. 박성간(朴聖幹)을 병참장(兵站長)으로 하여 곽산 정주를 점령하고 선천(宣川)이서의 여러고을을 함락시켰다. 난고 김병연의 조부(祖父)인 김익순(金益淳)은 함경도 함흥 중군(咸興 中軍)에서 선천 방위사로 부임한지 3개월 되던 날 홍경래 난을 사전에 대처(對處) 하지 못한 김익순은 박성간에게 포박당하고 항복하고 말았다. 5개월 후 홍경래난을 평정(平定)한 순조왕은 다음해 3월9일 난에 패한 김익순은 죽음을 당하였다. 이때 김병연의 나이는 6세밖에 되지 않았다.

어렵게 학문을 터득한 병연은 과거보는 시험장에서 과장(科場)에 걸린 문제를 보고 단숨에 시(詩)를 써 내려갔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작성한 문제 답안이 조부 김익순을 호되게 꾸짖는 것임을 집에 돌아와 어머니로부터 내력을 전해들어 알게 되었다. 장원(壯元)이 된 영광도 잠시 결국 할아버지를 지탄한 죄로 번민 끝에 하동면 와석리로 이주하였다.

며칠밤을 지샌 병연은 결국 자책과 통한을 이기지 못하고 22세 나이에 하늘을 가리는 갓을 쓰고 방랑길에 나섰다. 이때부터 김립(金笠)김삿갓 이란 별명을 얻게 되었다.

조부 관직(官職)발령에 따라 양주에서 함흥으로 떠나야 했던 김삿갓의 운명은 죽장에 삿갓 쓰고 떠도는 나그네 신세가 되고 말았다. 날이 새고 날이 저무는 순간에 세월은 오고 가는데 부자(富者)지키려 하니 괴롭고 가난은 배고픔에 괴롭다. 배부름과 배고픔이 고르지 못하니 부하지도 가난하지도 아닌 사람 됨됨이가 원이로다 부패한 사회를 풍자적으로 비웃으며 모든 희망을 버리고 팔도강산을 유랑하며 걸식(乞食)을 하였다.

난고 김삿갓은 언문시, 국한문, 혼용시, 해학시, 고풍과시에 이르기까지 많은 명시를 지었으며 풍자해학시는 전무후무한 절세(絶世)시로 남겼다. 특히 고풍과시는 후세 과거 지망생들의 교과서로 쓰일 뿐 아니라 평민들의 애환에 위로와 희망을 주고 서민 문학을 남겼다. 그는 철학가요 유명한 시인이었다. 방랑시인 김삿갓은 끝내 철종(哲宗)14년(1863년) 3월29일 전라도 동복(同福)마을에서
57세의 일기로 한많은 삶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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