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9 경술국치가 주는 교훈. 기억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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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9 경술국치가 주는 교훈. 기억해야 한다.
  • 허일회
  • 승인 2014.09.25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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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일회 대진대 겸임교수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인 1910년 8월29일은 우리나라를 일본에 빼앗겼던 국치일이다. 우리는 이날을 ‘나라가 부끄러운 날’ 로 기억하려고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주위에 8월29일을 국치일로 기억하는 사람들이 과연 얼마나 될까? 일반국민들에게 8월29일은 낯설기만 한 날이다.

이러한 사실을 안타깝게 여긴 사람들은 국치일을 다시 기념일로 제정하자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렇다면 국치일은 그동안 어떻게 기억되었고, 언제 우리의 기억 저편으로 사라진 것일까? 1910년 8월 29일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념과 망각의 역사를 짚어보려 한다.

‘한일 병합에 관한 조약’은 1910년 8월29일 1주일 전인 8월22일에 데라우치 마사다케 총감과 대한제국의 이완용 대신 간 비밀리에 체결되어 망국은 기정사실이었다. 단지 이날은 대내외에 그 비보를 ‘공포’하는 날이었다.

일본은 경찰병력을 총동원하여 백성들의 눈과 귀를 막아놓은 상태였지만, 거리에는 완전무장한 경찰과 헌병이 깔렸고 일본 기마대는 순찰을 돌고 있었다. 시간이 되자 남산아래 자리한 통감부에 군복차림의 데라우치 마사다케 통감이 이완용을 비롯한 대한제국 대신들을 거느리고 나타나 ‘행복증진과 동양평화’를 약속하며 조약을 정식으로 발표했다.

‘제1조 한국의 황제 폐하는 한국정부에 관한 모든 통치권을 완전 또는 영구히 일본 천황 폐하에게 넘겨준다.’로 시작되는 총 8개항의 조약이 순종황제의 서명 없이 공포되었고, 이로부터 대한제국은 역사 속으로 사라져 갔다.

당시는 국내는 물론이요 중국, 러시아, 미국 등 대한국인이 사는 곳에서는 이 날을 기념했다.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건국기념일. 3월1일 기념일과 함께 8월29일을 3대 기념일의 하나로 추념했다.

표현대로 ‘우리의 뼈 속에 깊이 새긴 가장 비참하고 가장 절통한, 민족이 오래도록 되새겨야 할’이 날이 오면 어김없이 기념식을 거행하고 성명서를 발표했던 것이다. 만주 동포들은‘국치추념 가’를 부르며 이 날을 되새겼다.

국내에서는 합법적인 기념식이 불가능했다. 일본경찰은 8월29일을 전후한 시기가 되면 긴장하고 경계를 강화했다. 독립신문은 1919년 8월29일 국치기념일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글로 남겼다.

‘29일에는 각 상점이 일제히 철시하되 마치 예약한 듯하고, 잡상인이라도 문을 연 자가 전무하며, 외국인도 문을 열지 않았다. 오전 10시경에 북악산에 큰 태극기를 달고 만세를 불렀다. 일본은 헌병 순사를 총동원해 하루 종일 자동차로 시가를 횡행했고 골목마다 헌병이 지켰다.

용산의 일본군은 하루 종일 포를 쏘아 한성을 위협했다. 인심의 혼란은 전시보다 더 한듯하며 비상경찰 및 정탐을 경성 모든 곳에 깔아 놓았다.’(독립신문 1919년 9월9일자)

매년 8월29일 국치일만 되면 ‘국치기념일을 잊지 말자’는 격문살포나 낙서 사건이 일상적인 일이 되었다. 형무소 정치범들이 국치일 단식동맹을 조직하가나 노동자들이 국치일을 기념하는 총파업을 계획하기도 하였다.

국치일로부터 34년 11개월 보름만인 1945년 8월15일, 조국이 해방되었다. 1946년 국치기념일, 조국은 해방되었지만 완전한 독립을 이루지 못했다는 이유로 성대하게 행사를 치렀다. 하지만 좌우 이념투쟁이 치열했던 상황을 반영하듯 좌우익은 국치기념일 행사를 별도로 진행했다.

1948년 정부 수립이후에는 공식적인 기념식이 개최되지는 않았지만, 달력에서는 국치일이 기념일로 남아 있었다. 이승만 시대에는 달력으로나마 기념되었던 국치일이 사라진 것은 언제일까?

해방과 함께 국치일에 대한 기념의 효력이 상실되면서 자연스럽게 잊혀져갔을 것이고, 한일관계가 복원되었던 박정희 시대에 들어와서는 달력에서 슬그머니 사라져갔다.

우리가 역사를 통해 되새겨야할 점은 선조들이 잘 한 것은 계승·발전시키고 잘못된 부분은 그 전철을 밟지 않도록 후손들에게 훈계하는 일이라고 생각해본다.

청나라는 청일전쟁(1894.7~1895.4)시 일본에 참패를 당하고 그 결과 양국 간에 시모노세키 조약이 체결되었다. 전쟁 후 뤼순 항에는 청일전쟁을 기념하는 기념관을 만들어 후손들에게 교훈으로 삼도록 하고 있다. 그들은 패한 전쟁을 왜 굳이 후손들에게 가르치려고 할까?

경술국치,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인 1910년 8월29일에 일어난 사건이었지만,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부끄러운 사실이기도 하다.

그런데 오늘날 이 날을 기억해야함은 무엇을 의미할까?
역사를 돌아보면 지도자나 지배계급이 무능하여 국가통합에 실패할 때 국가의 뿌리는 흔들린다. 그러다 외부세력의 변화에 대응하지 못했을 때 국가가 존망의 위기에 처했음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 잘 알고 있다.

과거 한반도는 패권국이었던 청나라가 쇠락하는 상황에서 20세기를 맞이했다. 당시 일본은 부상하는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역외 패권국인 영국과 협력하였다.

그 와중에 독도와 거문도가 일본과 영국에 강점됐고 결국 주권을 빼앗겼다. 역사적으로 청이라는 든든한 동맹도 침탈, 패망에서 지켜주지 못했다.

작금의 대한민국은 민족 및 국가통합은커녕 북한의 핵위협과 미·중의 세력쟁탈전 속에서 생존을 추구하는 전략을 찾아야 한다. 과거 실패를 교훈삼아 대내적으로는 공동체성을 증진시키려는 노력이 절실하다.

내적 통합의 촉진은 국력증진의 핵심이다. 대외적으로는 인접국가간 협력을 촉진하는 전략적 선택으로 역내 긍정적인 역할을 담당해야한다. 우리의 대외전략은 역내국가와 협력관계를 증진시키는 것이다.

국가 내부역량을 증대시키는 역내 균형과 대외적 정세를 잘 활용하면서 국가의 이익을 도모하는 역외 균형을 조화롭게 추구하는 것이다. 전자는 국가통합의 문제이고 후자는 인접국가와 동맹이나 제휴로 직결된다.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의 모습도 중요하지만 안보와 외교는 과연 어디쯤 가고 있는 걸까? 2014년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지금으로부터 104년 전의 ‘경술국치’를 기억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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