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홍녀(車紅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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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홍녀(車紅女)
  • 홍정덕
  • 승인 2014.12.15 1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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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평생교육원 교무부장



일제강점기는 조선시대 전체를 일관(一貫)하던 각종 예술의 전통이 급변하며 소위 근대화의 물결에 편승한 새로운 경향의 민중예술이 나타나는 시기이다

그중 가장 성공적으로 정착한 것이 가요와 연극, 영화인데, 이들은 민중들이 지향하고 요구하던 새로운 문화 기호(嗜好)를 직관적으로 충족시키며 이에 종사하는 새로운 형태의 민중 예술인들을 통하여 새로운 형태의 흥행을 만들어 냈다.

“신파(新派)”라고 불리던 근대 연극 역시 새로운 형태의 유행가와 결합하면서 “악극(樂劇)”이라는 새로운 쟝르의 무대예술이 탄생하는데 일제강점기 전체를 통하여 가장 많은 관객을 동원하고 민중의 적극적인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악극 작품이 바로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였다.

<홍도야 우지 마라>라는 제목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는 이 작품은 1936년 7월에 한국 최초의 연극 전용 상설극장인 동양극장에서 <청춘좌>에 의해 초연되었고 이 가극 <사랑에 울고 돈에 속고>의 주인공으로 당대(當代)를 풍미(風靡)하였던 배우가 바로 차홍녀(車紅女)였는데 이 배우가 우리 의정부와 깊은 관계가 있다.

생전에 그녀는 신문 인터뷰를 통하여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 - 고향은 어듸서요?
車 - 경원선(京元線) 동두천(東豆川)역에서 마루택을 하나 넘으면 밤나무 욱어진 동 리 초가집 한 20戶 되는 마을이 바로 내 고향이람니다.
나 - 무대에 나서기는 어느 때 이엿서요?
車 - 바로 의정부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든 해, ...그러니 열다섯 살 때임니다.

그러니까 그녀는 동두천에서 태어나 우리 의정부에서 학교를 졸업한 것이다. 그녀가 졸업했다고 밝힌 <의정부공립보통학교> 바로 현재의 <의정부중앙초등학교>이다.

<사랑에 속고, 돈에 울고>가 얼마나 흥행에 성공했는지는 공연 때마다 순경이 동원되어 관객을 정리하지 않으며 입장하지 못한 관객들 때문에 폭동이 일어날 상황이었고, 서울 시내 기생 모두가 하루 종일 이 악극을 보러 극장에 상주하는 바람에 기생집 영업이 불가능했다는 당시의 신문기사를 보면 짐작이 된다. 이 악극의 주제곡인<홍도야 우지 마라>는 지금도 나이 지긋한 분들의 애창곡이기도 하다.

'홍도야 우지 마라'를 작사한 이서구의 노래비가 그의 고향 시흥시 방산동에 그의 추모비와 함께 건립되어 있다. 그러나 정작 그 악극의 주인공 <홍도>, 차홍녀(車紅女)의 흔적은 우리 의정부에 없다. 그녀는 포천에서 추운 겨울날 공연을 마치고 나오다가 길가에서 떨고 있는 한 걸인을 안아주었는데 그 걸인으로부터 천연두에 전염되어 21세 아까운 나이에 요절하였다.

그녀의 모교인 우리 의정부중앙초등학교 교정에라도 그녀를 기념하는 비석하나 세우는 것은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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