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국이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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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이 그들을 기억하는 방법
  • 한북신문
  • 승인 2024.06.17 07: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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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홍정덕 논설주간·양주역사문화대학 교수

1950년 후퇴하는 국군과 연합군을 따라 남하하던 국군 정보장교 김종벽 대위는 고향 황해도 자연에 들렀다가 그곳 반공청년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적후 유격대인 ‘연풍유격대’를 창설하게 된다.

이 반공 유격대는 처음 600여명이 결집하여 몽둥이로 무장한 채 구월산 기슭의 안악, 장연, 은률, 재령 등지의 공산군, 행정기구를 습격하며 혁혁한 전공을 세워나갔고 서해의 백령도, 초도, 석도 등 30여개의 주요 도서를 장악하고 인민군 2개 정규사단을 황해도 서부지역에 묶어 놓은 채 공식전과 기록만 984명의 중공군을 사살하고 296명을 생포하는 동시에 30여만의 자유 인민을 바닷길을 통해 월남시키는 큰 공적을 세운다.

1951년 1월 이들이 장악하고 주둔하던 석도(席島)를 방문한 미 극동사령부의 켈로(KLO)부대 한국연락사무소의 한국인 직원이 이들의 열악한 식량, 무기, 피복, 통신 및 의료체제를 파악하고 이들을 돕기 위해 1951년 7월 구월산 유격군의 여러 부대들을 미국 극동 사령부의 첩보, 게릴라 부대인 KLO 8240부대로 통합 편제하여 연합군의 관할 하에 두게 된다. 그리고 연합군의 훈련 및 군수, 무기지원으로 한층 강력한 화력을 갖춘 유격군은 수많은 첩보 활동, 유격전, 사보타주, 조종사 및 포로 구출 임무 등을 수행하며 무수히 많은 희생을 치르게 된다.

비극은 휴전 협정이 진행되면서 북한이 이들 유격군이 장악하고 있는 신의주 앞의 대화도 황해도 서안의 초도 등 여러 도서들을 북한 관할로 넘겨줄 것을 요구하고 협상의 결과 북한의 요구를 수용하여 서해 5도 이북지역에 북방한계선을 그으면서 본격화되었다. 유격군이 협상을 인정하지 못하고 지속적인 연안 도서 주둔 및 상륙 침투활동을 고집하자 당시 이들을 관할하던 버크 중령은 유격군을 강압하여 체포한 후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입소시켜 버렸고 휴전 이후 남측 지역으로 복귀하지 않고 북한 지역에 남아서 활동하던 KLO부대원들은 대부분 담당 부대에서 통신망을 끊어버려 휴전협정과 동시에 한국과 미국 정부 양국에서 버림받았다.

그동안 이 켈로부대 출신들은 국가의 배려를 받지 못하다가 『참전군인 등 지원에 관한 법률』에 의해 1996년에 들어서야 2410명의 켈로 출신 전사자들이 대전 국립묘지에 봉안되었고 위령비가 세워졌다.

이에 따라 생존자 230여 명의 군번 없는 전사들이 군번과 참전용사증을 받게 되었다. 명단이 확인된 대원 중 전사·실종자 총수가 3415명이고 생존 대원 총 수는 350여 명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후 육군에선 정식 특수부대를 창설하기로 하고 육군본부 특전감실에서 그때까지 육군에 남아 있던 8240부대 출신 장교 20여 명과 8240부대 출신 하사관들을 창설요원으로 차출하여 제1전투단을 창설한다. 이들은 오키나와에 주둔하는 미국 육군 그린베레 제1특전단 교육대에서 공수교육과 특수전 교육을 받고 돌아왔고 1958년 10월 1일 부대 명을 제1공수특전단으로 개칭한다.

눈부셨던 청춘을 고스란히 국가에 바치고 군번조차 받지 못한 채 몸 바쳐 투쟁했던 유격군 중에 현재 생존하여 계신 90노령의 국가 유공자가 받는 공로연금은 매월 16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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